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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야경 (초파일)

작년에는 도심에서도 가장 혼잡하고 화려한 봉은사에서 야경을 찍어 봤지만 이번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큰딸이 절에 가보자고 해서 당일보다는 전야가 좋겠다 싶어 집 근처 북한산 삼천사로 향했다.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지니는 게 버릇이 돼서 챙겨 들고 갔는데 잊고 갔더라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가로등조차 없는 적막한 산길을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삼천사에 도착하니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고 그 가운데 경내를 밝히고 있는 연등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스펙터클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뒷 배경은 우뚝한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키 큰 소나무와 산줄기의 곡선이 멋진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계곡에 물소리와 소쩍새 소리 눌은밥 영화 속의 밤 같았다. 도심의 화려하던 등불과는 달리 내면의 ..

등산 2009.05.02

시원섭섭함이란?

삶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몇 번의 이별이 찾아 오지만 강 물 위에 꽃잎을 띄워 보내 듯 간절한 염원을 담아 고이 보내야 하는 이별도 있었네. 새끼를 가진 삶이란 천일염보다 짜다,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이 깊은 의미로 느껴지는 밤. 그렇게 염전 같았던 가슴으로 키워낸 딸을 떠나보낸 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었다. 자식 하나를 올바르게 키워내는데 들어가야 하는 공은 어쩌면 짜디짠 염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역할의 일부가 끝났다는 안도감이 주는 일은 염전에 작은 물길 하나를 두어 민물이 들어오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몇 번의 이별이 또 얼마나 가슴을 적실지 모르지만 내가 잘 살아주는 것, 그것은 나를 위함이라기보다는 떠나간 내 일부를 위함일지도 모른..

living note 2009.04.08

행복은 많은 댓가를 필요치 않더라

행복은 순간의 연속이지 영원한 게 아니다. 오늘 하루 행복해 지기 위한 일정은 간단했다. 빈 몸으로 나서서 배낭 가득 행복을 담아 오는 데는 그리 많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산이 품고 있던 뭇 생명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본다는 게 재미있었고, 혈액 같은 계곡물은 산의 혈관을 돌고 돌아 꽃과 잎을 피워내고 있었으며 가늘게 드리워진 실가지에 돋아나는 어린잎에"참 예쁘구나" 한마디 해 주면 한 아름 행복을 주고, 진달래 한 송이를 카메라에 담고 나면 연분홍 행복이 담겨 온다. 그동안 오르기 힘들어 지나치기만 했던 삼각산의 한 봉우리인 노적봉에 오르기로 결정하고 한 발씩 올라가는 그 과정에 흔한 것 같지만 처음 보는 토토리의 껍질을 깨고 뿌리를 내리는 이쁜 모습도 보고, 야생화며 진달래 ..

등산 2009.04.02

딸과 함께 즐거운 한 때

어제는 산 밑에 살면서 누리는 혜택을 얼마나 많이 받을 수 있는지를 실감하는 날이었다. 이제 막 진달래가 피고 있을 것 같은 따스한 날씨를 그냥 보낼 수 없어 연일 새벽에 퇴근하는 작은애를 데리고 오전엔 푹 재운 뒤 며칠 전에 해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언제나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는 아이가 난 너무 좋다. 새로운 프로젝트 때문에 두 달 동안 평균적으로 새벽 3시는 되어야 퇴근한다. 그것도 매일 25,000이나 하는 택시를 타고서 한 달 택시비만 60만 원 정도를 회사에서 지급받으며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딸, 너무 안쓰러워인 인삼을 달려 먹이다가 부족할 것 같아 홍삼으로 계속 먹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체력을 닮았는지 잘 견뎌주고 그런 중에서도 엄마와의 약속을 이행해 주는 그 애가 난 참..

등산 2009.03.23

존재감 있는 사람이 되자

나의 존재감 나에게 있어서 존재감이 없는 것을 말하라면 유행가 가사 2절 같은 것이다 1절보다 더 멋진 가사라 하더라도 난 한 번도 2절을 알려고 애써본 적이 없으니까 집안에서 존재감 1위일 때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차츰 밀려나 유행가 가사 2절이 되었다. 정해진 나의 한계에 다다르는 동안에 나의 존재감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기억되는 부분보다 잊히는 상실감이 더 클 것 이기에 애써 나를 부각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가 가꾸어오던 꽃밭에서 한 포기씩 분양된 꽃(딸들)들은 더 이상 그 꽃밭을 돌아보지 않는다. 나의 영역엔 잡초가 무성하고 박차고 나간 꽃들은 나 없이도 잘 살고 있으며 더 이상 잔소리가 먹혀들지 않는, 더 나아가 이 세상 한 귀퉁이에 나 하나 없다 해도 계절은 돌고 돌 것이며 봄..

living note 2009.03.16

나를 위한 시간

참 지루하게도 해 바쳤다. 거친 표현을 하고 싶은 주부라는 자리, 그 무수한 날들에 가족을 위한 밥상에 나의 숟가락이 얹힐 뿐 남편을 위해서 국은 꼭 있어야 하고자 식을 위해선 졸임이나 찜 같은 게 있어야 하고 냉장고는 차 있는데 나를 위한 찬통이 없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만의 상을 차리기로 했다. 나의 상은 편리해야 하고 내가 좋아해야 한다. 가족이 다 나가고 난 후 점심 한 끼 먼저 커피콩을 갈아서 실내 가득 향을 풍겨 놓고 물을 끓여 원두를 걸러놓는다. 직접 만든 요구르트에 직접 만든 매실을 넣어 소스를 만든다. 그다음에는 사과. 바나나. 호박고구마 으깬 것. 적채. 호두를 담고 소스를 끼얹어 샐러드를 만들고 빵 한 개 반을 구워서 그 위에 올려서 먹는다. 그런데 가끔은 진한 커피 향이 마주하고 ..

living note 2009.02.28

수정 같이 녹는 얼음의 변신

겨울산행은 화려한 영상도 없고 조금은 밋밋한 맛이다. 그러나 돌아올 땐 언제나 한 가지라도 얻어오는 즐거움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주에 너무 좋았던 기억 때문에 오늘 다시 같은 코스를 갔는데 시야도 맑고 경치도 선명했지만 지난번 같은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다 드러나는 것보단 조금은 은근하게 보일 듯 말듯한 신비의 멋이 더 좋은 것 같다. 좋았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다시 찾아가서 환상을 깨고 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혜를 얻은 샘이다. 오늘의 선물은 단연 얼음의 변신이다. 며칠 전에 비가 온 것이 계곡에 물이 많아졌고 추위도 눅어졌는지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이 얼음을 녹이면서 다양한 얼음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형체도 없이 물이 되고..

등산 2009.02.18

구름낀 정월대보름

구름아,달을 뱉어라 하늘을 닦아 보름달을 볼까 하였더니 구름은 숨구멍 틈도 내 주지 않으니 내 맘에 구름을 걷어 심안으로 만나리라. 바람을 일구어 구름을 쫓아 보려 온몸으로 춤을 추어도 바람은 닫지 않고 은쟁반을 받쳐 든 빈손을 내리지 못하네 설익은 소원 하나 삼백예순을 기다려 결실을 보잤더니 무정한 구름이 소원까지 묻어 버렸네.

living note 2009.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