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251

도봉산 (오봉에서 첫 단풍을....)

혹한과 혹서를 견디다 보면 다시는 다른 계절이 오지 않을 것 같음을 느낀다. 겨울 뒤에 봄이, 여름 뒤에 가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린다. 계절의 악조건을 견디어 낼 때에는 그것마저 뭔가 쓸모 있음을 찾는다면 나쁜 계절은 없다. 두 번이나 미루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최적의 날을 맞았는데 내 몸 컨디션이 엉망이다. 전 날 밤 잠을 놓쳐버리고 겨우 한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안 좋았지만 내가 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이 더 안 될 일이어서 먼저 도착할 친구에게 약을 부탁하고 기어이 그 장소, 그 길을 올랐다. 몸이 안 좋아도 산속에 더 좋은 처방이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너무 좋은 풍경을 보면 혼자 독락 ..

등산 2023.10.16

오산 마등산

몇 년 전만 해도 연분홍색 연달래라고 부르던 산철쭉에 대해서 계절의 여왕이 오월이 쓴 왕관 같다고 썼는데 올해는 산철쭉이 오월이 되기도 전에 다 져버렸다. 물론 높은 산에는 아직 피지도 않은 곳이 있겠지만 동네 주변 야산에는 일찍 피고 일찍 저버려서 꽃에 대한 계절 인식을 달리해야 할 정도다. 경기도 오산에 있는마등산길을 5개의 봉우리를 다 거치면서 11킬로를 걸었다. 완만하고 나지막한 산길은 등산이라기보다는 산책길이다. 좁다란 오솔길을 초록색으로 하늘을 가린 솔밭길을 걸으면 꽃들은 지고 잎들이 연두에서 짙은 초록색으로 변했고 아직 벌레들이 시식도 하지 않은 보드라운 잎들이 윤기 나게 싱그럽다. 산에 살던 숲 속 식구들이 정체성을 감추고 깊이 잠들었던 초목들이 일제히 깨어나 저마다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고..

등산 2023.04.26

얼레지 만나러 간다.

앙상하고 새까맣던 나무를 볼 때는 다시는 초록잎을 달지 않을 것 같았다. 꽃도 다시는 피워낼 것 같지 않던 나무들이 어떤 힘으로 까만 몸에서 저토록 화사한 꽃 진달래를 낳았을까. 인위적으론 불가능할 아름다운 색채에 감동하는 하루하루의 화사함이 검은 밤 속에 묻히는 시간도 아깝다. 오늘은 노루귀 다음으로 꼭 봐야 하는 얼레지를 만나러 간다.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덤으로 보는 진달래가 마음부터 분홍색으로 채색이 되게한다. 하루가 다르게 무채색 바탕에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는 봄의 손길이 경이롭다. 대지의 모성인지 자연의 모성인지 모를 위대한 무위자연의 현상을 인간의 마음으론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데 어느새 초록이 짙은 귀룽나무가 작은 꽃망울을 열심히 키우며 초록빛 나뭇잎을 다 뒤덮을 정도로..

등산 2023.04.03

북한산 봄꽃

생명가진 것들은 다 "나 살아있다"라고 외치듯 꽃과 잎을 피워내는 봄은 참 활기찬 계절이다. 봄은 너무 짧아서 마치 봄을 상영하는 영화 한 편 보듯이 필름이 쭉 돌고나 버리면 끝이다. 그래서 봄은 마음도 몸도 괜히 바쁘다. 집에 있는 날도 마음은 밖을 배회하며 안정을 찾지 못한다. 그래도 몸에도 휴식할 시간을 줘야 하기 때문에 책을 붙들고 있지만 책장이 제자리를 맴돌며 넘어가지 않는다. 삼월 중순에 솜털 보송보송한 분홍색 노루귀를 보고 청노루귀가 보고 싶어 북한산으로 갔는데 길가에 지천으로 피던 그 많던 노루귀가 왜 다 없어졌는지 의문이 들었다. 너무 길가에 있는 장소 때문인지 누가 캐갔는지 자연적으로 죽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겨우 몇 포기만 보고 왔다. 그러나 애써 찾아간 게 헛 걸음은 아니었다. 청..

등산 2023.03.30

우이령길

땅 속에서 뭇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삼월 중순에 그들을 이제는 깨워도 될 것 같아 발자국소리 크게 내면서 산을 가로지르는 우이령길을 걷는다. 언 땅도 녹고 언 마음도 녹아 길을 가기에 너무 좋은 새봄이다. 산속 음지 골짜기에는 아직 얼음이 있지만 길 옆 조팝나무는 아주 작은 이슬방울 같은 싹을 내밀고 나무의 겨울눈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모습이 너무 이쁘다. 2009년 통제되었던 우이령길이 열리지 마자 찾아갔던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4년이 흘렀으니, 그때는 마치 신작로를 고르기 위해 모래를 뿌려 새길을 내는 듯했는데 지금은 길 옆 주류를 이루는 국수나무와 잡목들이 자라면서 산길다운 모습이고 길은 다져져서 맨발로 걷게에도 좋아 보였다. 걷..

등산 2023.03.08

덕유산의 상고대밭(송년산행)

덕유산 설경을 본다는 건 잡다한 한 해 동안의 마음속을 마무리와 시작의 교차점에서 버리고 떠나기 같은 갈래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순수의 절대적 가치를 안겨준다. 덕유평전은 형체 없는 유령 같은 것들의 놀이터였다. 구름이 놀고, 바람이 놀고, 찬서리들이 놀다가 덕유산의 정령에 붙잡혀 깜짝 놀라 얼어붙어 정체성을 드러내고만 하얀 유령들의 주검 같은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형체 있는 인간들은 그 하얀 밭에서 좁디좁은 신들의 발자국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비켜서지도 못하고 부딪치며 미소로 지나친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내리면 때 묻은 발을 들여놓기가 미안할 정도로 순백의 절정이 사뭇 치도록 아름다웠다. 단체로 내려섰지만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뿔뿔이 흩어져 인솔자의 통제는 이미 힘을 잃..

등산 2022.12.30

성남누비길 완주

성남 누비길 완주를 송년산행으로 한 해의 트래킹을 마무리했다. 한해의 막바지에서 뭔가 금을 긋고 지나가야 끝이란 어감에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미루었던 성남 둘레길 때 맞추어서 드디어 완주를 하고 송년회까지 했으니 길 하나와 2022을 시간의 길이만큼 길을 늘려가면서 걸어온 시간을 함께 거두어 잘 마무리했다. 완주라는 말에는 시작에서 끝나는 지점까지에 어떤 장애요인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한 해 한 해의 완주가 쌓여서 삶의 완주가 무사히 끝날 때까지 길을 걷듯이 하루하루를 이어 나갈 것이다. 어제가 오늘과 다르지 않지만 연말이라고 하면 뭔가 마무리 짓고 새로움으로 시작해야 된다는 마음이 늘 보이지 않는 선 하나를 긋게 한다. 한 해의 빗장을 열고 밀고 들어왔던 2022년의 대문을 닫고 ..

등산 2022.12.16

겨울숲

잘 사는 줄 알았다. 산천의 숲이 산을 꽉 채우고 녹음이 우거졌을 때는 마냥 싱싱하게 잘 살아간다고만 보았다. 그런데 이제 훌훌 벗어던진 나목들의 겨울 숲을 들여다보니 잘 사는 것만은 아니었다. 주어진 여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무들은 서로 부대끼며 바람이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살아내고 혹한, 혹서도 견디어내야 했던 나무들, 가지를 뻗을 자리다툼도 했을 것 같고 이웃 나무들이 이리저리 틈새를 비집고 가지를 뻗으며 소리 없는 다툼으로 견디어냈을 나무들의 생존경쟁이 치열했을 것으로 보였다. 여러 잡목 속에 사는 덩굴들은 닥치는 대로 남의 몸을 휘감으며 괴롭혔을 텐데 피하지 못해 받아들인 나무의 몸에는 움푹움푹 패인 자국도 보인다. 그리고 사이좋은 나무는 사랑한다며 남의 가지에다 떡하니 팔을 걸기도 하고 그..

등산 2022.11.29

가을길

가을길은 쓸쓸한 길 가을 길에서 고독함을 안다면 인생도 가을길 인생의 가을이 나쁜 것만은 아니야 잎들을 다 떨궈내고 숙면을 취하는 나무들처럼 인생도 그래, 어떤 역할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나만의 여생을 즐길 수 있어 좋아. 고운 낙엽 하나 주워 들여다보면 한 해의 고단했던 삶이 고스란히 다 들어 있지. 사계절을 겪어내면서 다채로웠던 색상으로 꽃 피우고 잎 피우면서 변신을 하다가 마지막을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가을 길은 한 생이 떠나가는 길이고 거름이 되어 모체로 돌아가는 길.

등산 2022.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