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253

수원화성의 설경

며칠간 봄비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요란한 비가 아니라 겨울꽃눈을 살살 만지며 눈을 뜨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막 눈을 뜨려는 산수화에 노란 물방울이 봄망울 같이 대롱대롱 맺혀 있다. 비 내리던 날씨가 새벽사이에 함빡 눈으로 바뀌면서 남몰래 꽃을 피우고 있었나 보다. 어릴 때의 기억에도 저장되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겨울풍경은 밤사이 내린 눈이 아침에 문밖으로 나갔을 때 와! 하고 새로운 세상이 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던 그 기억이다. 우리 동네는 키 큰 나무와 숲이 좋아서 멀리 가지 않아도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는 있지만 때마침 트레킹 약속이 있는 날이어서 너무 좋았다. 가까운 건 늘 멀리에 밀리는 순서에 놓인다. 그래서 여행은 먼 곳에 가면 뭔가 더 좋은 것이 존재할 것 같은 마음이 ..

등산 2024.02.22

모락산 눈밭

겨울산은 한 해 살이가 끝나고 성장을 위한 것들의 잠을 재워주듯 숫한 생명을 품고 있는 단조로운 흙빛으로 고요하다. 보이지 않아도 조심해서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이니기 때문에 산길이 아닌 곳을 벗어나 걸어갈 때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얼굴을 밟을 수도 있고 여려해 살이들의 생명을 꺾어버릴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기도 한 것이 겨울 산이다. 의왕시에 있는 모락산(383m)은 여러 번 갔지만 겨울산은 처음이다. 도심에서 설경을 본다는 것은 함박눈이 내리는 당시가 아니면 보기 힘든다. 혹시 모를 눈길 산행을 위해 아이젠을 준비해서 갔더니 바닥에는 눈이 제법 남아 있어서 산행 내내 아이젠을 착용하고 걸었다. 봄 여름에 걸을 때는 몰랐는데 눈 덮인 모락산은 왠지 더 큰 산 같았..

등산 2024.01.11

2024년 신년산행(수원 칠보산)

이벤트의 중요성, 연말이 되면 국가적인 차원의 이벤트, 개인들의 이벤트가 곳곳에서 열리고 거리는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이는 천국의 밤이 된다. 거리의 나뭇가지들이 수난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날들이 있어서 뭔가 다른 날임을 알게 해 준다. 우리도 송년의 이벤트를 가졌던 것은 다름을 인식하고,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행사였다. 어느새 한 해의 포장지를 개봉하자마자 달아난 날들이 나 잡아봐라 하는 것 같다. 바로 따라가긴 힘들지만 뒤쳐져서라도 따라가려면 더욱 부지런해야겠지. 한 해를 보낼 때는 송년이란 이벤트가 많아서 여러 가지 감흥이 일어난다. 아쉬움, 반성, 후회 등등. 그래서 함께 모여서 이벤트를 하면서 특별한 날을 보내게 되니 한 해의 마지막날이란 것이 실감이 나는데 새해, 새날이란 건 며칠이 지..

등산 2024.01.04

덕유산 설경

긴 겨울을 보내면서 멋진 설경 한 번쯤은 봐야 지루함을 심리적으로나마 단축시킬 수 있다. 그 멋진 설경을 보기 위해서는 덕유산으로 가야 실패할 확률이 낮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덕유산은 갈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라고. 왜냐하면 15분 걸리는 설천봉까지의 거리가 마치 15시간이 걸리는 것 같은 줄 서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이탈리아 바티칸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2시간 동안 줄을 섰는데 이번에도 그 버금가는 덕유산 정상을 향해 곤돌라 타기 위한 줄 서기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약 50미터짜리 끈을 네 번으로 접어야 할 정도로 지그제그로 사람의 선을 펼쳐놓고 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서 손발이 견딜 수 있었지만 며칠 전처럼 영하 10도 정도의 바람까지 심한 날이라면..

등산 2023.12.29

덕유산2(백암봉,동엽령에서 안성으로 하산)

중봉에서 사방을 조망한 후 덕유평전에서 마음마저 하얗게 백지 같은 상태가 되어 설화를 그리며 긴 능선길을 걷다가 백암봉에 한 번 더 오르고 나면 동엽령까지 가서 하산길로 들어선다. 한눈에 들어오는 하얗고 드넓은 덕유평전의 넉넉함 속으로 내려서면서 큰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눈꽃을 카메라로 담다 보면 마치 큰 산에 눈송이로 수를 놓은 듯한 사진이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인데 이번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지만 그 하얀색이 다른 어떤 색상보다 곱다. 그렇게 드넓은 평원에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가는 눈길이 너무 행복한 시간이다. 동엽령에서 물도 마시고 쉬다가 안성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구간이다. 아름다운 설경을 다 봤고 이제는 발밑만 보면서 내려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30..

등산 2023.12.29

트레킹의 즐거움

길을 걸었고, 길을 걸을 것이다. 물의 흐름은 끝이 있지만 길의 흐름은 어디가 끝인 줄을 모르고 정지된 듯하면서도 길 위에 올라서면 그것이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2023년 12월, 이 시점에서 돌어보니 단단하게 봉해진 한 해를 커팅하는 순간부터 길을 따라서, 길 위에서 우리는 흘러왔다. 아름다운 흐름이었다. 참 많이도 걸었다. 내 몸에 무명실을 두르고 그 끝을 길 위에 깔면서 걸었다면 아마 멋진 그림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연초에 선으로만 그린 드로잉이 완성되고 계절 따라 채색되어 가는 걸 지켜보는 즐거움에 빠져 지내다 보면 어느새 채색은 빛이 바래져 무채색의 겨울이 되고 한 해도 마무리가 된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길을 따라 흘러왔다. 어쩌다가 몸이 쉬어달라라고 반항을..

등산 2023.12.07

불암산

가을이 떠난 자리, 가을이 남긴 자리를 더듬어보려고 불암산을 찾았다. 가을이 떠난 자리라면 산자락을 뒤덮은 낙엽으로 그 여운을 남기고 있었고, 가을이 남긴 자리라면 텅 빈 충만 같은 게 있었다. 텅 비었다는 건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초록으로 메워졌던 자리가 텅 비었고, 충만이란 건 떠날 건 떠나고 남을 건 남은 그 자리를 다시 초록으로 채울 수 있는 모성을 간직한 나무들의 몸통이 숲을 꽉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텅 빈 듯하지만 가득 찬 겨울숲 속은 짙은 녹차향이 발자국마다 배어 나왔고 간밤의 겨울비로 젖은 눅눅함을 밟고 오랜만에 정상을 향해가는 길은 지난날의 기억을 찾을 수없었다.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전에 올랐으니 옛날 그 산이 아닌듯했다. 그때는 바위에 온통 붉고 검은 낙서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좋은 ..

등산 2023.11.24

안동 천등산 봉정사

언젠가 뉴스에서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오래된 건물이 발견되었다는 것. 그 목조건물이 바로 안동 봉정사라는 걸 알고 나니 꼭 보고 싶었다. 무량수전보다 13년이나 앞선다는 봉정사 극락전인데 와서 보니 사찰 안에 있는 전각들이 전체가 국보와 보물이고 시대 또한 고려말부터 신라 초. 중. 후기까지의 건축양식이 한자리에 다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봉정사의 또다른 놀라운 점은 너무 아름다운 장소라는 것이고 뒤에는 천등산이 있고 경내의 정원은 고목으로만 우거진 숲이 대단하고 영산암으로 오르는 계곡의 숲과 만세루와 우화루를 들어섰을 때의 아름다움, 다시 온다면 천등산도 올라보고 하루쯤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그..

등산 2023.11.08

안동 농암종택

청량산 산행을 마치고 걸어서 농암종택까지 올 계획이었으나 산행에서 쌓인 피로 때문에 택시로 바로 오고 말았다. 평소에 우리가 하던 트레킹에 비하면 거리상으로 가능했으나 이어질 일정을 생각해서 숙소로 바로 왔다. 해 질 무렵에 농암종택에 들어섰더니 농암선생의 17대 종손인 이성원 종손님의 안내를 받아 한속정사로 들어갔더니 이미 따뜻하게 방을 데워놓으셨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선 여정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 대자연가든으로 안내받아 저녁을 먹고 밤길을 걸으며 숙소로 가는데 물소리 풀벌레소리만 들리고 하늘엔 별이 총총한데 폰 플래시로 길을 밝히며 밤 마실길 같은 숨죽인 밤의 정적을 느껴보는 것이 오랜만에 해본 경험이었다. 안동에는 숙박할 수 있는 고택과 종택이 45곳이 있다. 종택이 18개, 고택이 27..

등산 2023.11.06

청량산도립공원(축융봉)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 싶다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그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번 3박 4일간의 안동여행도 그랬다. 몇 년 전에 혼자 도산서원에서 이육사문학관까지 걷다 보니 왕모산 밑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멋진 풍경에 반해 일대를 서성이다가 조금 더 올라가니 단천교에서 시작되는 여뎐길이라고 하는 미완성의 길이 표지판만 있고 공사 중이라고 해서 더 가지 못하고 돌아서며 퇴계선생이 청량산까지 산책을 했다는 퇴계오솔길을 따라 다음에 꼭 걸어보겠다고 마음먹고 늘 그 길을 그리워했다. 그 후로 여태 가지 못하다가 3년이란 시간 속에 여행길이 묶이기도 해서 훌쩍 세월만 흘려보내는 사이 길은 완성이 되었고 그 길은 선비순례길 4코스라는 새로운 테마길이 되었다. 그래서 계획된 여행길에 친..

등산 202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