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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과 범어사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금정산을 드디어 올랐다. 금정산을 가기 위해서 범어사를 먼저 참배를 했다. 마침 이월 초하루여서 경내는 신도님들로 북적이고 대웅전은 이미 들러설 틈이 없어 겨우 관음전에서 삼배를 드릴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대성암에 가면서 경내를 지나갔지만 기억나는 건 계곡에 돌이 많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금정산은 크고 질 좋은 암석이 많아서 전각의 주춧돌이 마치 기둥 같은 돌로 높게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돌이 건축자재로 많이 쓰인 것 같고 무엇보다 누각이나 일주문의 돌기둥인지 추춧돌인지 모를 만큼 나무 기둥과 돌기둥의 높이가 반반이라는 것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범어사는 금정산이 양팔을 뻗혀서 포근히 끌어안고 있는 형상 아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전과 지장전이 일직선에 있..

등산 2024.03.10

통도사 자장매와 평산책방

작년 2월 하순에 성급하게 통도사를 찾았다가 일주일만 더 있다가 왔으면 너무 좋은 자장매를 볼 수 있었겠다고 했던 아쉬움이 있어서 올해는 3월 초순에 다시 찾았더니 이번에는 일주일만 더 빨리 왔으면 완벽했겠다는 아쉬움을 또 남겼다. 완벽하면 또 다른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완벽을 기대하기보다는 완벽을 기대하는 마음이 어쩌면 더 큰 재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낱개의 꽃잎은 시들었지만 그림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아름다움과 색감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거리의 차이로 내가 기대했던 완벽의 미를 감상할 수 있었다. 절간의 기와지붕과 너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붉은 매화와 분홍매화가 겹쳐 보이는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그림같이 이쁘다. 그 외에도 통도사는 역사의 깊이와 영축산 위용의..

living note 2024.03.08

여행처럼(부산)

동백꽃을 보듯 내 딸 보러 부산에 왔다. 딸부자였던 친정엄마는 동서남북에 딸을 시집보내고 여행처럼 딸네집을 찾았다니셨다. 그 옛날에도 농사로 바쁜 시골사람들은 여행이란 한가한 생각은 꿈같은 것이었지만 우리 엄마는 여행처럼 딸을 찾아다니면 동네사람들은 부러운 듯이 "남호댁은 좋겠다, 조선팔도를 다 다니고" 하면서 부러워했다. 신장로에서 엄마가 내릴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었나 보다. 옆옆이 두 딸을 두고 살다 보니 시집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가족 하나 더 생긴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별나게 살고 싶어 하는 작은 딸이 여행처럼 전국을 다 찾아다니며 국토순례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하더니 그 첫 번째의 정착지로 부산을 선택하고 부산에 근거를 두고 남..

living note 2024.03.06

끝없는 새로움

어제는 하루종일 뭔지 모를 사소한 것으로 기분이 흐렸으나 오늘은 사소한 한 가지가 기분을 밝게 해 준다. 이처럼 나이가 쌓인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움으로 가득 채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아직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은 진행 중인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흔히 발전이 없을 때 "이제 다 살았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정신이 정지상태가 되었을 때 해야 하는 말이다. 가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맴돌 때가 있다. 잠 못 드는 밤에는 어리고 풋내 나는 기억들을 다 끄집어내어 갖고 놀다가 버리지 못한 채 잠재의식 속에 보관하게 된다. 그러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참 많이 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만났을 때가 너무 좋고 새로움이란 것에 한동안 마음이 붙들릴 때가 좋다. 며칠 전에..

living note 2024.02.28

수원화성의 설경

며칠간 봄비가 지루하게 이어졌다. 요란한 비가 아니라 겨울꽃눈을 살살 만지며 눈을 뜨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막 눈을 뜨려는 산수화에 노란 물방울이 봄망울 같이 대롱대롱 맺혀 있다. 비 내리던 날씨가 새벽사이에 함빡 눈으로 바뀌면서 남몰래 꽃을 피우고 있었나 보다. 어릴 때의 기억에도 저장되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겨울풍경은 밤사이 내린 눈이 아침에 문밖으로 나갔을 때 와! 하고 새로운 세상이 된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던 그 기억이다. 우리 동네는 키 큰 나무와 숲이 좋아서 멀리 가지 않아도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는 있지만 때마침 트레킹 약속이 있는 날이어서 너무 좋았다. 가까운 건 늘 멀리에 밀리는 순서에 놓인다. 그래서 여행은 먼 곳에 가면 뭔가 더 좋은 것이 존재할 것 같은 마음이 ..

등산 2024.02.22

모락산 눈밭

겨울산은 한 해 살이가 끝나고 성장을 위한 것들의 잠을 재워주듯 숫한 생명을 품고 있는 단조로운 흙빛으로 고요하다. 보이지 않아도 조심해서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이니기 때문에 산길이 아닌 곳을 벗어나 걸어갈 때는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얼굴을 밟을 수도 있고 여려해 살이들의 생명을 꺾어버릴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기도 한 것이 겨울 산이다. 의왕시에 있는 모락산(383m)은 여러 번 갔지만 겨울산은 처음이다. 도심에서 설경을 본다는 것은 함박눈이 내리는 당시가 아니면 보기 힘든다. 혹시 모를 눈길 산행을 위해 아이젠을 준비해서 갔더니 바닥에는 눈이 제법 남아 있어서 산행 내내 아이젠을 착용하고 걸었다. 봄 여름에 걸을 때는 몰랐는데 눈 덮인 모락산은 왠지 더 큰 산 같았..

등산 2024.01.11

2024년 신년산행(수원 칠보산)

이벤트의 중요성, 연말이 되면 국가적인 차원의 이벤트, 개인들의 이벤트가 곳곳에서 열리고 거리는 별이 내려앉은 것처럼 반짝이는 천국의 밤이 된다. 거리의 나뭇가지들이 수난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날들이 있어서 뭔가 다른 날임을 알게 해 준다. 우리도 송년의 이벤트를 가졌던 것은 다름을 인식하고,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한 행사였다. 어느새 한 해의 포장지를 개봉하자마자 달아난 날들이 나 잡아봐라 하는 것 같다. 바로 따라가긴 힘들지만 뒤쳐져서라도 따라가려면 더욱 부지런해야겠지. 한 해를 보낼 때는 송년이란 이벤트가 많아서 여러 가지 감흥이 일어난다. 아쉬움, 반성, 후회 등등. 그래서 함께 모여서 이벤트를 하면서 특별한 날을 보내게 되니 한 해의 마지막날이란 것이 실감이 나는데 새해, 새날이란 건 며칠이 지..

등산 2024.01.04

덕유산 설경

긴 겨울을 보내면서 멋진 설경 한 번쯤은 봐야 지루함을 심리적으로나마 단축시킬 수 있다. 그 멋진 설경을 보기 위해서는 덕유산으로 가야 실패할 확률이 낮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덕유산은 갈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라고. 왜냐하면 15분 걸리는 설천봉까지의 거리가 마치 15시간이 걸리는 것 같은 줄 서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이탈리아 바티칸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2시간 동안 줄을 섰는데 이번에도 그 버금가는 덕유산 정상을 향해 곤돌라 타기 위한 줄 서기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약 50미터짜리 끈을 네 번으로 접어야 할 정도로 지그제그로 사람의 선을 펼쳐놓고 있었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서 손발이 견딜 수 있었지만 며칠 전처럼 영하 10도 정도의 바람까지 심한 날이라면..

등산 2023.12.29

덕유산2(백암봉,동엽령에서 안성으로 하산)

중봉에서 사방을 조망한 후 덕유평전에서 마음마저 하얗게 백지 같은 상태가 되어 설화를 그리며 긴 능선길을 걷다가 백암봉에 한 번 더 오르고 나면 동엽령까지 가서 하산길로 들어선다. 한눈에 들어오는 하얗고 드넓은 덕유평전의 넉넉함 속으로 내려서면서 큰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눈꽃을 카메라로 담다 보면 마치 큰 산에 눈송이로 수를 놓은 듯한 사진이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인데 이번에는 조금 부족한 듯하지만 그 하얀색이 다른 어떤 색상보다 곱다. 그렇게 드넓은 평원에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가는 눈길이 너무 행복한 시간이다. 동엽령에서 물도 마시고 쉬다가 안성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구간이다. 아름다운 설경을 다 봤고 이제는 발밑만 보면서 내려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30..

등산 2023.12.29

작은 송년회

작지만 이쁜 송년회를 가졌다. 일 년을 함께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보는 조촐하지만 함축적인 송년회가 되었던 것은, 우리의 놀이가 짧게 짧게 다 들어 있는 하루가 되도록 짜인 시간이었 다. 늘 해오던 것들, 길을 걷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거, 이 절차를 다 넣어서 시행하고 마지막에 집에서 와인과 케이크로 마무리하는 작은 송년회의 의미는 왁자지껄한 어떤 송년회보다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송년회의 의미는 어제와 오늘 사이에 마음의 선을 긋고 새것, 새로움, 시작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시간의 흐름에는 어떤 구분도 없이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이 다르지 않겠지만 인식을 달리해야 하는 시간개념에 마음으로나마 보이지 않는 선 하나라도 긋고 시작한다는 다짐 같은 것이다. 불가항력이란..

living note 202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