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287

웅덩이 하나만

웅덩이 하나만 간밤에 단비가 지나간 자리 아무렇게나 파인 웅덩이에 하늘이 놀고 구름이 놀고 바람은 하늘을 흔들며 논다 작은 것에 큰 것이 잠긴 화엄의 세계가 길 위에 있었네 하늘이 내 눈 아래도 있네 발을 담그어 승천해 선녀나 되어볼까 그러나 발을 담그면 하늘은 깨어지고 검은 웅덩이 하나 남아 화엄은 그만 사바의 꿈이 되고 말아고말아 내 가슴에 웅덩이 하나 만들어 하늘을 담아내고 구름을 담아내고 가장자리엔 바람이 물어온 씨앗을 심자 숲이 되고 꽃이 피고 비라도 오면 맑은 샘 되게 하여 새들 목 축이고 나그네도 쉬어가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허로이 두지 말고 이만큼 살았으면 가슴 한켠 작은 웅덩이 하나 만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얼마나 넉넉한가 가진 것 다 내어주고 잔잔한 수면 하나만 두자.

living note 2015.03.02

한글 창제의 비화

정찬주 소설`천강에 비친 달을 읽고, 제목의 뜻은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듯 부처의 가르침이 온 백성에게 드리우길 바랐던 세종과 신미대사가 이룬 한글 창제의 진실이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한자의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작가가 한글 창제의 비화를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보았기에 나 또한 그 뜻을 함께 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 책은 허구의 소설만은 아니라 영산 김 씨 세보, 문종실록, 세종실록에 기록된 것을 고증을 거쳤고 또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문을 쓴 정인지의 문장에 드러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이 세종께서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하신 걸로 알고 있을 것 같고 나 또한 그런 줄 알았지만..

living note 2014.12.02

첫눈 오는 날

첫눈이 저토록 펑펑 내리는데 난 왜 이토록 덤덤하게 되는지 밤새 몰래 내린 눈 위에 맨 먼저 새겨지던 내 발자국 그 열정은 어디로 가고 행여 이 마음 시릴까 포근히 감싸줄 솜이불 깃이나 덧대고 있다니 옆에서 보채는 강아지 놈 열정이 넘치는지 발자국 남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 내 고운 옷이 빨래가 되어가는 열정이여. 그러나 그러나 눈발에 떠올리던 첫사랑조차 가물거리지만 단 한 사람 그 사람 혹여 눈으로 찾아올까 손바닥 위에 고이 받아 본다.

living note 2014.12.01

용인 한국민속촌

떠날 건 떠나고 남을 건 남은 늦가을, 친구와 단 둘이 걷고 싶은 곳 찾아 용인 민속촌으로 갔다. 그 곱던 이파리들도 떠나고 떨어진 낙엽도 쓸려 나가고 사람들마저 붐비지 않는 한적한 날이다. 맛있는 먹거리들로 즐비하던 난전들도 문을 닫았고 주말이 아니어서 참 한가로이 걸을 수 있었다. 거리는 깨끗이 쓸려 있고 보드라운 황톳빛 바닥의 촉감이 참 좋다. 무엇을 본다고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한가로이 걸으며 화려함이 지나간 뒤의 그 여운을 즐기러 갔기 때문에 그런대로 좋은 장소였다. 우리가 다 보고 이용까지 했던 과거의 물건들은 쓸모도 시간도 정지되어 있고 초가의 지붕은 이엉을 이기 전의 누추한 모습으로 썩은 속살을 털어내고 한창 월동준비로 분주히 보내는 모습이었다. 마당을 쓸고 있는 아저씨, 엿장수 ..

living note 2014.11.19

시간 속에 산다는 건.....

오랜만에 도시 지하철을 탔다. 겨울 옷에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지하철에는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는 모양이 각양각색이다. 난 아직 가을이 한창인데 어느새 오리털 파카를 입은 사람은 왜 겨울일까? 그에게는 가을이 얼마든지 남아서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듯하다. 시간 속에 산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길들여지고 시간에 복종하고 시간에 순응한다는 것, 시간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배하고, 시 은 피라미드의 가장 윗자리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그건 마음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마음으로 저물어가는 가을을 헌팅하러 세 여자는 서울 남산으로 간다. 우리는 해마다 10월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낸다. 우린 단풍이야, 그러나 봐! 얼마나 고운지를 가는 가을 잡아채고 봄..

living note 2014.10.31

시대의 멘토

김수환 추기경님 묘소 은빛 고운 아침에 이쁜 꽃 어루만지며 산책을 한다. 내 산책길 끝에는 고운님 잠드신 "천주교 서울교구" 묘역이 있다. 몇 번이나 산자락에서 바라봤지만 너무 넓어서 못 찾을 것 같아 되돌아왔다. 오늘은 꼭 찾으리라 생각하고 가다가 마침 참배 가족을 만났다."김수환 추기경님 묘소가 어디 계시는지 아세요?" 물어서 찾아가니 성직자묘역이 따로 있었는데 그 생각은 못 하고 뭔가 특별하리라 생각하고 찾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신자였더라면 이런 실수는 안 했을테고 좀 더 일찍 참배했을 텐데 무척 죄송했다. 찾고 보니 일반 신자의 묘소보다 특별하진 않았고 꽃이 더 많다는 거 주교님과 나란히 계신다는 거, 그거였다. 추기경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다 쫓기는 자 다 보듬어 주시고, 아픈 자 다 찾아가 ..

living note 2014.09.22

현명한 딸의 효도(천진암성당과 두물머리)

오곡백과가 영글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맑고 푸른 초가을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를 느끼는 이 좋은 가을의 중심이 되는 한가위 연휴 마지막 날, 양 가족의 나들이가 가을 속의 풍경이 되어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딸 부부는 참으로 현명한 효도를 하고 있다. 친정과 시댁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이 효도를 하자는 주의로써 늘 우리는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 어쩌면 한 번의 수고로 마음 편해지는 결정일 수도 있고 또한 그 어울림이 좋은지도 모른다. 노는 일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연휴에 손님 치르고 밤늦게까지 놀다 보면 잠도 부족하고 일하는 날보다 더 피곤할 수도 있는 게 명절인데 마지막 날에 사돈 내외분과 남한산성에서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천진암에 들러 성지를 둘러보고 다시 양수리 두물머리에 가..

living note 2014.09.11

난 팔불출이라도 좋아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 했던가? 그러나 기꺼이 팔불출을 자처하며 딸 자랑을 하고 싶은 날이다. 왜냐하면 내가 잘한 일이라곤 두 딸 잘 키워 놓은 것뿐이라서 자랑할 거라곤 그것밖에 없다. 장마도 지나고 어느덧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날이어서 집안 곳곳을 열어젖히고 습기도 말리고 환기를 시키느라고 열었는데 뭔지도 모를 상자들이 있어서 다 열어 정리를 하던 중에 길게는 30년이 고이 잠들어 있는 내 정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큰애와 작은애의 상장 상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받은 상장과 졸업장 성적표가 고스란히 모아져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이사를 하고 버린 짐도 많은데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기쁘고 이젠 세월이 아까워서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주인한테 넘겨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정리를 해..

living note 2014.09.02

경주 금선사

경주시 충효동 선도산 금선사 금선사는 경주시 충효동 선도산 자락에 있다. 선도산은 경주의 서쪽에 자리 잡은 높이가 390m밖에 안 되지만 전설이 있는 신라의 진산이다. 그 이유는 선도산 정상에는 `성모 유허비`란 비석이 있고 조금 아래에는 성모 사당이 있다. 그리고 반대편 선도산 자락에는 국보 20호인 태종 무열왕릉 비가 있고, 사적 20호로 지정된 태종 무열왕릉과 진흥왕릉, 진지 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 여러 왕릉과 김인문, 김양 등의 묘소도 있는 걸 봐서는 분명 명당자리인 것 같다. 聖母는 성모 마리아란 뜻이 아니라 `성스러운 어머니`란 뜻이며 신라의 건국신화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상징적 어머니로 전해지고 있다. 아직도 사당에선 매년 음력 3월 1일에 제사를 지내는데 특이한 것은 제관과 봉찬..

living note 201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