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소설`천강에 비친 달을 읽고,
제목의 뜻은 "천 개의 강에 달빛이 비치듯 부처의 가르침이 온 백성에게 드리우길 바랐던 세종과 신미대사가 이룬 한글 창제의 진실이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한자의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작가가 한글 창제의 비화를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보았기에 나 또한 그 뜻을 함께 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 책은 허구의 소설만은 아니라 영산 김 씨 세보, 문종실록, 세종실록에 기록된 것을 고증을 거쳤고 또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문을 쓴 정인지의 문장에 드러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이 세종께서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창제하신 걸로 알고 있을 것 같고 나 또한 그런 줄 알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한글 창제에 신미대사가 등장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서 숨 가쁘게 읽었다. 그리고 세종대왕님께서 집현전 학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미대사와 같이 뜻을 세우고 비밀리에 완성하기까지의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고 창제를 끝내고 실용까지도 했지만 반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은 워낙 창제 자체를 거부하는 유신들의 저항에 부딪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좋은 우리글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글을 읽고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세종대왕님께 감사한 생각이 든다. 처음에 한글창제의 뜻을 세우신 것은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무지한 백성들도 많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셨다. 그래서 신미대사와 뜻을 함께하시면서 비밀리에 진행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 7차례나 연속으로 사신들을 보낸다.
올 때마다 150명이 넘는 사신들과 진기한 보물을 가져와서 세종의 환심을 사려하지만 세종께선 우리나라에 한 본밖에 없는 한자 본 목판이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신들은 때를 쓰면서 아예 단식투쟁에 들어간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인쇄본과 금자 화엄경판, 밀교 대장경판, 주 화엄경판을 내어준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알고 나니 팔만대장경을 끝까지 지켜내신 대왕님의 뜻이 너무 감사하고 지금이라도 그때 빼앗다시피 가져간 경판들을 되찾아야만 한다는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역사였고 유신들이 유교문화에 젖어 얼마나 무지했는지 알 것 같다. 당시는 배불숭유의 사상이 정책이었고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국시였다. 그래서 유신들은 우리글을 따로 만드는 것은 국시를 위반하는 것이라며 반대했고 다 만들어진 다음에도 훈민정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언문이라며 무시했다. 그뿐 아니라 대신들은 읽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것이니 왜국(일본)에게 줘버리라고 한다. 이런대도 우리는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줄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이제라도 바로 아는 것이 후손 된 도리일 것 같다.
한글 창제의 과정을 알기 전에 먼저 신미대사를 알아야 한다. 신미대사는 영산 김 씨 김훈의 아들 김수성이란 사람이다. 아버지 김훈은 정종과 태종 사이에서 세력다툼에서 엉뚱한 죄목으로 쫓겨난 벼슬아치인데 그 죄목은 불효 불충으로 인해 폐고 가 된다. 폐고란 연좌제의 형벌로 가족까지도 책임을 져야 하는 죄다. 그래서 아버지는 귀양 가고 아들은 배가 고파 밥을 얻어먹기 위해 법주사로 가다가 눈사태를 만나 헤매다. 법주사 암자인 복천사에서 스승인 함허 대사한테 알려져서 보호를 받는다. 함허 대사는 그의 행색은 남루하지만 얼굴에서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제자로 받아들인다.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의 처음 만남은 세종 2년(1420.8.6일)에 흥천사에서 이다. 어머니 원경왕후의 제를 올리기 위해 궁에서 가까운 흥천사에 갔다가 신미대사의 우렁찬 염불소리에 감탄하면서 만나게 된다. 흥천사는 태조 이성계가 신덕 완후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현재 성북동에 있는 절이다. 신미대사는 머리가 좋고 범어에 능통한 분이셨다.
한글 창제 과정을 보면 배불정책 때문에 맘대로 스님을 만나기도 힘들던 시기였지만 세종대왕은 비밀리에 함허 대사와 신미대사를 만나고 아들 딸을 모두 불교에 귀의시키고 공부를 하게 한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였다. 당시 글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그림으로 나타낸 일생도이다. 그 후 신미대사는 왕사가 되고 밖에서 만나는 것이 힘들어서 궁에다가 내불당을 짓고 신분은 집현전 학사로 승격시킨다.
우리글의 자음과 모음은 범자(천축국의 글)를 참조했으며 창제에 있어서 創은 세종, 製는 신미의 몫이었다. 범자의 전해진 경로를 보면 고려말 천축국의 승려 지공 스님이 들어와서 나옹-무학-함허-신미대사로 이어진다. 한글이 반포되기 전에 실용으로 원각 선종 석보 언해를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며 선대 여섯 분의 공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지었지만 그 와중에 소헌 완후가 세상을 떠나고 반포는 자꾸만 지연된다. 그러다가 드디어 세종 28년. 9월 29일에 정인지가 서문을 쓰고 집현전 학사들의 해례를 여러 번 독해한 뒤 역사적인 반포를 한다.
정인지는 서문을 쓰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왜냐하면 훈민정음 창제에 자신과 집현전 학사들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린다는 송구함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집현전 학사들은 찬성파 김수온(신미대사 동생), 신숙주, 성삼문 반대파 최만리, 김문, 하위지 등등이 갈등을 겪는다. 무용지물이라며 왜국에게 주어버리라는 유신들의 주장을 이겨내면서 팔만대장경판을 지켜내시고 우리나라 최초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한글로 지으셨고 궁궐의 내불당 낙성식 때 곤룡포 두 벌을 불단에 바침으로써 신하들에게 승부의 군주임을 선언하셨다. 신미대사의 전성기는 세조 때였다 그래서 한 가지 전설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충북 보은의 정 2품 소나무의 일화인 세조가 지나갈 때 처져있던 소나무 가지가 저절로 들렸다는 이야기는 바로 세조가 스승인 신미대사가 은거하고 있는 복천사를 찾아갈 때의 일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라고 결론지으며 성리학이 득세하던 시기에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밀리에 만들어 낸 우리말이 바로 진흙탕 속에서 태어난 연꽃이라고 했다. 참고로 업적에 신미대사의 이름이 빠진 것은, 알려지면 그의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일찌감치 뺀 거라고 한다. 그리고 원래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응무소주 이생 기심`(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을 실천하신 거라 생각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보람된 일은 바로 모르던 것을 책을 통해 알았을 때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세종대왕님, 신미대 사남 존경합니다. 이 사실이 많이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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