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287

금선사의 달밤(우란분절)

음력 7월 보름, 지옥문이 열리는 날 밤 달빛 청아하다 살아서는 해가 뜨면 깨어나고 죽어서는 달빛으로 깨어나는가 서라벌의 진산 선도산 정수리에 새벽달 푸르고 목련존자 지극한 정성으로 어머니 손잡고 달 속에서 걸어 나오신다 우리 몸이 우주이며 태극인걸 양의 기운 점점 쇠하고 사그라들면 태극 같은 몸은 꼬리만 남고 그 꼬리조차 사라지면 음의 배아가 점점 성하여 태극의 머리가 푸른 달빛으로 태어나 어둠을 밝히는데 태양으로 살다가 태음으로 된다한들 서러울 게 뭐가 있으랴 거룩한 존자님 달을 박차고 걸어 나오는 길에 푸른 단청 빛나고 초록 잎들은 청제 부인인양 양의 기운이 서리는구나.

living note 2016.08.18

비내리는 창가

비 내리는 창가 비를 휘는 바람 쉬이 닿지 못하는 줄기 꽃을 받혀든 사람 말간 나무들 샤워하는 아파트, 이쁜 공간 있고 커피 있고 분위기 있고 음악 흐른다. 한 모금 흘러드니 단전에 투과되는 빛처럼 따스다 몸은 풍경 8층에 갇혔고 발 묶인 시선만 비 맞으며 쫓아다닌다. 빛없고 먼지 없고 볼일 없고 시선 거두어 눈에 가둔다. 비 그치면 강아지 몰고 빗속 말간 풍경 속으로 간다.

living note 2016.07.05

절망에 맞서는 법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가 쓴 최초의 생태소설 `하늘의 뿌리` 주인공인 모렐이 아프리카 코끼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이야기입니다.개발을 하려는 인간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주인공이 수용소 시절 극한 상황에서 그의 친구들이 절망에 맞서기 위한 방법으로써 로베르라는 친구가 `보이지 않는 여자`를 상상해 내고 그 여자를 지켜내는 상상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습니다. 수용소에서 로베르라는 친구가 마치 감방 안에 그 숙녀가 있는 것처럼 예의를 갖춰 행동하기 시작한다.이 존재하지 않는 숙녀로 인해 수용소 생활은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수치심을 몽땅 내던지고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던 포로들이 이 `상상의 여인`을 의식해서 몸가짐을 추스르고 품위를 지키게 됨으로써 감방 안에 웃음이 피어나기까지 ..

living note 2016.06.10

예천 회룡포

봄은 천국이 잠시 내려앉은 거다. 그러나 마음까지 봄물이 들어야 천국에 내가 있는 줄을 안다. 이봄, 천국을 휘젓고 다니는 내 발길은 `나의 살던 고향`을 둘러보고 예천으로 가서 회룡포를 굽어본다. 낙동강 칠백리 여정이 만들어낸 그 시화의 한 폭에 내가 서 있다. 산이 물을 막아서면 물은 그 산을 비켜 맞서지 않고 하심으로 돌아서 흐른다.그게 물의 심성이다.나의살던 고향은 낙동강 상류였다. 쏘가리가 살고 은어가 뛰던 그 맑은 물에서 몸을 담그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 물 상류에서 늙지 못한 나는 어느새 생의 긴 여정에서 오염된 낙동강 물을 닮아져 있어 너무 슬프다.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화가도 되고 기술자도 되고 때로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심연의 신비주의가 된다.그 긴 여..

living note 2016.05.02

경주의 봄나들이

올해는 벚꽃이 약 일주일 정도 일찍 피었다. 3년 전에는 4월 11일에 갔는데도 벚꽃이 한창이어서 그때 생각만 하고 갔더니 늦었다. 하얀 꽃 이파리들은 눈처럼 낱낱이 떨어져 날리고 빨간 꼭지만 남았는데도 꽃 진 자리조차 너무 아름답다. 이 길을 지나면 김유신 장군묘까지 꽃길이 이어진다. 고목이어서 꽃길 터널이 되었고 이 길 따라 혼자서 느긋이 걸으면서 김유신 장군묘를 거쳐 뒤편에 있는 옥녀봉까지 걸었다. 전날에 비가 많이 왔는지 촉촉한 길은 좋은데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서 너무 속상하다. 이 좋은 계절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한 채 산으로 올랐더니 눈가루처럼 꽃잎이 밟인다. 정상에 서도 풍경이 좋지 않아서 바로 내려와서 안강에 있는 양동마을로 갔다. 김유신 장군묘 가는 길 아래로는 유..

living note 2016.04.11

죽은 시간의 강

죽은 시간의 강 반야화 한 해의 빗장이 열리던 첫날부터 시간이 기어나온다.허술한 사립문의 틈으로 하루들이 살금살금 빠져나가 긴 흐름의 강물이 되고 나의 강은 바다로 가 짜디짜게 죽음을 맞는다. 바닷물이 다 증발하면 죽은 내 시간들이 소금의 결정으로 빛날 날 있으려나. 새해는 또다시 내 이마에 가로줄로 눕고 철문을 달아도 빗장은 열리고 마네. 끝없이 흐르는 나의 강은 눈물도 보태고 땀도 보태져 사해가 되었다 할지라도 어느 맑은 민물이 들어와 하늘로 데려다 주면 운우의 정으로 내려 파아란 대지에 청춘이고 싶다. 2015.12.24일 서글픈 날에 반야화

living note 2015.12.27

단풍에 빠진 우리마을

내 터전에도 가을이 왔다. 어느 산천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숱한 골짝 산 주름을 타고 바쁘게 어느덧 내 집 뜰 앞까지 가을이 들어차서 건축물만 빼고 작은 풀포기까지 가을에 물들고 독야청청할 것 같던 소나무까지 누렇게 물들지 않을 수 없는 가을 물감은 인위적으로 배합한 것보다 더 진하게 배어들고 있다. 아침마다 일출을 볼 수 있고, 달 뜨는 날이면 월출까지 볼 수 있는 높이의 정남향의 집이어서 좋고 밖을 나서면 1분 거리의 오른쪽에는 수목원같은 솔밭이 시작되고 왼쪽에는 법화산 가는 길이 참 멋진데 그 중앙에 위치한 언덕이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이다. 그리고 5분 거리에 또 공원과 탄천 상류가 있고 물줄기 따라 성곽같은 공원 숲에도 물감의 배합이 아름다운 이 가을이 좋다. 지난여름 매미소리, 풀벌레 소리의 코..

living note 2015.11.06

춘천으로 낭만여행

흘러버린 줄만 알았던 세월이 내 안에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그 순간을 찾아 떠난다. 계절의 변화를 겪으면서 내 안에 잠재된 순간순간을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의 노트가 누구나 한 권쯤 녹슨 가슴마다 간직되어 있겠지만 난 아직도 그 색 바래지 않은 감성이 너무 생생해서 괴로울 때가 다 있다. 그리고 아직도 더 채워 넣을 공간도 가슴 한편에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잡을 수는 없지만 쫓아다닐 수 있는 여력이 있어 너무 좋다. 그러나 꽃피고, 잎 피고, 단풍지는 그 적기를 다 내 것으로 만들기엔 역부족이어서 마음만 바쁜 가운데 친구들과 낭만의 도시 춘천으로 간다. 70년대, 그 혼란했던 시기에도 낭만은 있어서 무궁화호, 비둘기호 같은 완행열차를 타고 기타 치고 노래 부르던 구 경춘선 구간을 아..

living note 2015.11.04

양평 물소리길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지만 봄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은 그 틀별함을 보여주기엔 좀 이른 것 같았다. 제주에서 두 번 만나 길동무가 된 사람을 다시 서울에서 만나 양평 물소리길을 걷기로 하고 이른 아침에 나섰다. 아침 출퇴근 시간에 차를 타기는 참 오랜만이다. 버스와 지하철을 환승하면서 바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툭 튀어나온 배낭을 들이미고 서 있으려니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복잡한 차 안에서 놀러 가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서 복잡한 공간을 더 비좁게 하는 민폐를 끼친 셈이다. 분당에서 다시 신분당선을 환승하는데 놀라운 것은 시발점에서 이미 한 차 가득 차버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들어갔는데도 출발점이어서 다행히 서 있을 공간은 있었다. 지각을 워낙 싫어하..

living note 2015.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