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287

인제천리길 함께 걷기(자작나무 숲길)

너무 멋진 것을 본 다음 그곳에 다시 가기를 주저할 때가 있다. 다시 갔을 때 처음 본 아름다움의 환상이 깨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고이 간직해두고 언제나 자작나무, 하면 떠오르는 그 모습이길 바랐지만 이번에 무참히 깨어졌다.자작나무 숲에는 처음 같은 선경이 없었다. 나무는 변함없는데 지난겨울 마치 불청객의 방문으로 눈밭에 놀던 백학이 일시에 날아오르는 모습 같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꾹 다물었던 입은 어떤 탄성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탁세와 동떨어진 순수의 흰 바탕은 간 곳 없이 원래의 바탕은 흙이었다는 걸 보여주며 "너는 환상을 본 거야"라고 바로 알려주는 듯했다. 자연에서 실망은 없는 법, 지난번에는 하얀 숲을 보고 갔던 길로 되돌아 나왔는데 이번에는 자작나무 숲을 넘어서 그 일대 임도를 따라 걷..

living note 2019.01.23

인제천리길 함께 걷기(백담사)

함께 걷기 첫날, 한 치 앞을 모르는 미혹한 중생의 생을 살면서 어떤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 D데이에 다가가는 마음 졸임, 최상의 날이 되기를 바란다는 건 행운에 맡길 수밖에....... 이번 행사를 진행하면서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기간에 날을 받아놓고 기다리는 내내 눈은 예보도 없었으니 진행하시는 여러분의 마음이 멋진 그날이 되길 얼마나 간절했을지 짐작이 간다. 동참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그럴 때는 내 마음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눈이 없으면 날씨라도 투명하게 밝기를 바랐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세가 만든 잘못이지 하늘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청허 한 마음가짐으로 백담사로 향했다. 백담사 수심교를 지나면서 보면 언제나 한결같은 돌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는 좋은..

living note 2019.01.21

동지를 맞이하며....

**시침과 초침까지 있는 시계꽃* 2018.12.23 큰 의미를 지닌 동지를 맞았습니다. 동지가 지나면 음기가 사라지고 양기가 새싹처럼 움트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새롭게 받아 쥔 365일의 스케치북에 하루하루의 날들을 스케치하고 새싹에 물 주고 거름 주면서 잘 키워나가라는 각오를 세우는 날들이 주어진 거죠. 내 생활에 물을 준다는 것은 건강하게 나를 관리하는 것이고 거름이라면 온 가족이 행복할 수 있도록 뭔가를 피워줄 준비가 되어 있는 흙처림. 고운 바탕이 되어 주고 물과 공기와 빛이 잘 드는 곳에 나의 거름이 보태진다면 장미울타리가 드리워진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 봅니다. 낮은 짧아 허둥대다 다 가고 죽음 같은 밤 시간만 아깝게 흘렀으나 이제는 모락모락 자라나는 양기에 기운을 얻어 우리의 심신에도 새..

living note 2018.12.23

눈 오는 날의 단상

연말에 오는 눈은 뭔가를 덮고 가자는 뜻일 것이며 연초에 오는 눈은 하얀 바탕에 뭔가의 설계도를 새로 그리고 시작하자는 뜻이겠지요. 내게 있어 덮을 건 무엇이고 새로 써야 할 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시점입니다. 혹시 남의 허물을 보았다면 덮을 것이며 나의 허물을 보였다면 서설이 오는 날 하얀 바탕 위에 가장 먼저 하트 하나를 그리고 시작하겠습니다.사랑이라면 눈만큼이나 모든 걸 덮을 수 있으니까요.

living note 2018.12.13

청남대의 만추

어느새 입동의 절기도 지났지만 겨울을 여는 손길은 대청호에서 문고리를 잡고 주저주저하고 있다. 너무도 곱고 붉은 화장기를 밀쳐내고 가을 속에다 쉬이 겨울의 영역을 확대하지 못한다. 그러기엔 남아 있는 가을의 뒤태가 너무 고와서 시커먼 겨울의 손이 들어서기엔 수채화에 먹물을 끼얹는 격이 된다는 걸 겨울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과 겨울의 경계는 세우지 않은 채 다만 서로 만나서 악수하는 그런 순간이 있을 뿐이다. 설악에서 맞이한 가을을 대청호에서 배웅을 하는 날이다.어쩌면 내 내면의 바다에서 일어났던 파도를 잠재우고 가을이 떠났는지도 모른다. 여름내 잠잠하던 마음의 바다는 구월부터 파도가 일더니 마음 밖으로 물결이 밀려 나와 부단히 안과 밖을 쫓아다녔다. 이제 파도는 다시 내면으로 스며들고 5개월간의 ..

living note 2018.11.19

2018.11.4일,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스포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특별한 경험을 했다. 가끔 국가대항 스포츠가 열리면 축구든 야구든 경기를 보지만 그 외는 별로 보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야구의 룰도 모르고 더구나 구장에 직접 나가서 본다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그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꼼짝 않고 4시간을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쩔 수 없어서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루하지도 않았다는 게 어느 팀의 우승보다도 나에게는 더 큰 이변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11월 2일 금요일, 두산은 일찌감치 한국시리즈에 나갈 결승전 티켓을 거머쥐고 상대가 누가 될지를 관망하는 중에 있고 다른 한 팀이 올라가는 SK와 넥센의 5차전 경기가 열리던 날 자정까지 잠을 자지 않..

living note 2018.11.05

오대산 선재길

. 우리의 뇌, 마음속에는 조건이 주어지면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알고리즘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어떤 심미적 대상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4 미에 취하고 만다. 4 미란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말한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 이를 즐길 줄 아는 마음, 유쾌하게 노는 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선재길, 난 그 길 이름에서 느껴지는 게 있어서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길인데 해마다 다른 일정에 밀려서 3년을 벼르다가 드디어 원을 이루었다. 물론 처음 생각에는 그 길은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면서 걸어야 할 길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월정사에서 출발해서 상원사에 이르러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이튿날 산 정상까지 등산하고 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뒤로 미루고 이번에는 ..

living note 2018.10.17

경주에 가면......

유난히 별이 그리운 날 경주로 간다. 나만 볼 수 있는 별. 일 년에 한 번 별과의 랑데부를 하는 날이다. 한여름 우란분절의 밤하늘은 유난히 감청색이어서 그 별이 타고 온 구름 베끼지 선명한 채로 옆에 두고 우리는 랑데부를 한다. 해가 지고 옅어진 밝음 속으로 어둠이 스며들 때쯤 선도산 검푸른 나뭇잎 사이로 조명 같은 보름달이 차오르고 감청색 푸른 하늘 바탕에 창백하리만치 하얀 달은 내가 서 있는 금선사 종각과의 직선거리에서 나와 별 사이를 밝혀준다. 그리고는 슬며시 달이 비켜주면 수많은 별들 중에서 나만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별과 우리는 밀회를 즐긴다. 마치 지척 인양 그렇게 만나면 입 속에서 말라버린 말들이 부스러기처럼 다 날아가고 오직 또렷한 추억만을 마주 보며 닿지 못하는 손짓을 하는 애달픔만 ..

living note 2018.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