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287

2022년 첫눈

첫눈이 왔다. 첫, 자가 들어간 건 다 신선 함이다. 첫눈, 첫사랑, 첫 만남 첫 자가 들어가는 것에는 다 취기가 있다. 그것에 잠시 취(醉)하지만 취(取)하고 나면 때가 묻고 신선함은 일장춘몽의 허무로 깨어진다. 신선함의 신선도는 너무 짧다. 첫눈은 끝내 구정물로 흘러내리고 첫사랑은 이해관계가 되고 첫 만남은 탐색으로 변해간다. 그렇듯 신선함에 덤덤해질 줄 아는 지혜가 더 신선한 것임을 이제는 안다.

living note 2022.12.07

가을은 글을 쓰게해

가을이 주는 느낌은 모두 글이 되어 마음속 상형문자처럼 곱게 새겨진다. 침묵으로 바라보는 자연의 한 해 살이를 거두어들이는 그들의 연중행사를 지켜보는 것이 나에게는 가을이 남긴 것들로 한 줄이라도 써놓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감성을 자극한다. 어떻게 표현해도 표절이 될 만큼 흔하디 흔한 가을 예찬들이 많지만 난 단 한 줄, 이렇게 쓰고 싶다. 누가 저 고운 색채를 혼합해낼 수 있을까로. 팥배나무 열매가 빈 가지를 붉게 채색했다. 벗어도 아름답고 입어도 아름다운 나무의 생애 덕수궁에서... 한양도성길 위에서.... 가을은 시인이고 가을은 화가다. 대지는 끝없는 화폭이며 끝없는 빈 노트다.

living note 2022.11.15

방마다 모과를...

우리 동내 단지 안에는 유난히 모과나무가 많다. 분홍색 작은 꽃이 어느새 저 우람 한 결실이 되어 내방까지 들어찼다. 창밖으로 매일 내다보면서 마음으로 키워낸 모과다. 녹색 잎이 무성할 때 작은 열매는 보이지도 않다가 차츰 노랗게 익어가면서 집안에서도 잘 보이고 혹시 떨어졌나 확인도 하고 숫자도 세어가며 지켜보았다. 늦가을 찬바람에 잎은 듬성해지고 창밖엔 노랗게 빛나는 모과가 눈에 확 들어와 매일매일 인사처럼 창밖을 내다봤다. 간밤에 내린 비로 저 큰 덩어리가 매달리기 힘겨웠는지 몇 덩이나 떨어졌다. 달려있을 땐 바라만 봤는데 내 방에 들여놓으니 더욱 좋다. 향기도 주고 마치 나를 방문한 어떤 가을 손님 같이 반갑고 기분 좋은 만남이다. 누가 모과를 못났다고 했나,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저런 이쁜이가 없..

living note 2022.11.12

세모녀의 나들이

올해는 비 때문에 차질을 빚은 일이 두 번이다. 지난 8월 10일, 기록적인 수도권의 물난리가 있던 날 호캉스를 하자며 예약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큰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예약을 6주 뒤로 미루었다가 드디어 세 모녀가 초가을에 접어들어 서울 곳곳을 돌아보며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성수기에 날자를 미루는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8월보다는 가을이 된 날자로 미룬 게 잘된 것 같다. 빛은 따가웠지만 그래도 날씨가 맑고 높푸른 가을 하늘 아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두 번째는 경주, 포항이 물난리를 겪던 날이다. 9월 3,4일 경주여행은 가족 전체가 다 나서는 일인데 태풍이 예보돼 있어서 고민 끝에 결국 취소를 하고 말았다. 그것 역시 전전날 예약 취소를 했으니 환불이 안 되고 미루는 것도 시간이..

living note 2022.10.10

일상의 펑화

무엇이든 잃어봐야 그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던 우리 집에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 다른 나라로 떠난 지 몇 년 만에 만난 아이들은 훌쩍 커서 아기였던 두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돌아왔는데 지난 주말 1박 2일은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날이었다. 일상의 평화를 잠시 잃고 나서, 매일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나날들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평화를 되찾고 나서 그 가치를 느끼는 시간으로 돌아왔다. 나의 일상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일기를 확인한다. 온도, 습도 바람을 확인하고 좋구나 싶으면 뒷산 공원에 오르거나 탄천으로 달려가서 두 시간 정도를 걷는다. 그 외에는 아침마다 창을 활짝 열고 화단의 꽃들과 눈인사를 한 후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 집에서 대소변..

living note 2022.07.11

탄천의 아침

장마 끝에 하늘도 씻기고 땅도 씻겨나간 아침은 찬란하다. 잠시 비가 그치고 이른 아침에 현관 밖을 나섰더니 높이 솟은 것들이 듬성듬성 베어 먹은 하늘이지만 하늘의 진면목인 푸르른 얼굴은 찬란하기만 하다. 진면목을 가리던 지상의 먼지를 다 털어낸 보석 같은 하늘을 이고 숲을 지나 물 구경하러 탄천으로 갔다. 웃비가 그치니 물은 금방 잦아들어 강폭 안에서 흐르지만 전 날 실어 나른 쓰레기들을 수변공원에 다 걸쳐놓고 흙색으로 세차게 흐르는데 수변공원 넓은 곳의 풀들이 다 한 방향으로 누워 있고 양쪽 나뭇가지며, 떠내려간 벤치며, 쓸고 간 자취를 보면 수위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밤 강물은 평소보다 약 2.5미터 정도의 높이에 놓인 낮은 교각에 누군가 일부러 쌓아놓은 듯한 쓰레기들이 수북하고 강 둑..

living note 2022.07.01

오월의 특별한 기념일

오월은 심신이 바쁘다. 가정마다 다 그럴 것이다.챙겨야 할 날들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바쁘다. 계절이 좋아서 놀기도 바쁘고 남의 일 때문에도 바쁘고 이제는 나를 챙기는 날에 참석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바쁜 시간 속에 들어 있다. 참 많은 날들을 입을 막고 살았다. 외출할 때 자연적으로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은 필수품이라기보다는 마치 몸의 일부처럼 붙어 다녔다. 그러다가 한 가지 더 늘어서 마스크도 이제는 핸드폰과 붙어 있는 물건처럼 언제나 내 입에 붙어 있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어언 3년이 지나고 며칠 전에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침이 내렸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냐, 오월의 그 많던 어떤 기념일보다 더 특별한 기념일의 맨 앞자리에 두어도 될 만큼 나에게는 중요한 날이다. 특별..

living note 2022.05.01

단양여행(귀촌)

믿지 않았다. 그녀가 농부가 된다는 것을...... 현실은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더니 이제껏 내가 생각했던 평소 그녀의 모습에서 풍기던 이미지를 마음 한구석에 밀쳐놓고 그녀의 삶을 깊이 존중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시골로 이주를 해서 농사를 짓는다고 할 때 내가 했던 말은, 노는 땅에다가 꽃이나 볼 수 있게 도라지 씨를 뿌리든지 코스모스씨를 뿌려놓고 즐기라 했다. 그 말을 한 후로도 농기구를 샀다느니 트럭을 샀다고 할 때도, 장화를 신고 시골 아낙네의 차림세의 사진을 보고도 인정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여행 삼아 찾아간 그녀의 보금자리는 너무 아름다운 풋내기 농부의 터전이 맞았다. 오랜만에 버스와 기차를 타고 친구들(여행 메이트)과 단양으로 여행을 갔다. 행정구역은 단양이지만 제천과 ..

living note 2022.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