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288

꽃같은 시절

지천에 피어 있는 꽃들은 서로를 알아볼까요. 누가 더 이쁜지 누가 더 사랑받는지를. 사람도 꽃 같은 시절을 보냅니다. 우리 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 딸들은 아직도 꽃 이어 서일 까요! 옆에 꽃이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네요. 꽃을 몰라보는 모양입니다. 억지로 코앞에 들이밀어도 시큰둥합니다. 꽃 같은 시절에는 꽃이 아름답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 시절에서 너무 멀어져서 자꾸만 꽃이 이쁘고 늘 눈길을 주고받다가 시들 때가 되면 다시 꽃잎을 따서 마지막까지 싱싱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얼마나 이쁜지요. 다시 꽃이 되고 싶어서겠죠.

living note 2012.04.05

커피와 일상

무한대로 주어진 시간을 제한적으로 끊어 쓰는 것이 하루다. 오늘도 하루라는 시간을 열고 내 딸이 집안 가득 향기를 뿌려 놓고 말쑥한 차림으로 문을 나서면 나는 그 풋풋한 향기를 쌉싸무레한커피 향으로 밀어내 버린다. 그것이 내 일상의 시작이니까. 진정한 커피의 맛을 느끼려면 혼자 즐길 때 그 절정의 맛을 안다. 따끈한 물이 커피 속에서 방울방울 여과지를 통과하는 동안 나와 커피 사이엔 서로의 깊이를 가늠하는 침묵만이 맛에 도달하는 기다림이 되기도 하고 그 뒤에 있을 일과들의 순서를 정하며 아무런 할 일이 없어도 그것조차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된다. 같은 커피일지라도 연인들 사이에 놓인 커피는 그날의 대화에 따라 달콤하기도 하고 맹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싸늘하게 식어 버림받기도 한다. 또..

living note 2012.03.30

눈오는 날

낮에 내리는 눈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것도 변화된 세상입니다. 나 어릴 때는 눈은 한밤중에 숨어서만 오는 줄 알았지요. 자고 나면 장독대와 초가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만 봤거든요 내 마음 심층 가장 밑바닥에 있는 동심이 뛰쳐나와 눈밭을 뛰어다닙니다. 오늘처럼 따뜻한 방 안에서 넓은 창을 통해 눈 오는 걸 볼 수 있다는 건 겹겹이 세월의 층계가 있는 그 밑바닥 동심에는 있을 수 없었지요. 토굴 같은 초가 안에서 창호지가 유난히 밝게 보이는 정도였지요. 바로 창가에서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눈을 봅니다. 그러고 있으니 눈이 내 눈 속으로 들어올 것 같은데 눈이 흰색이어서 참 다행입니다. 저토록 가벼운 터치가 금세 설경을 그려내고 있네요. 앞뜰 작은 나무 실가지에 쌓이다 만 눈은 매화가 필듯한 봉오리 같습니다..

living note 2012.01.31

무엇을 어떻게 채울것인가.

변한 건 없는데 빼곡히 새로 들어찬 365일을 앞에 두고 새로이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시작이라고 해서 지난 건 다 비우고 새로 채우는 마음그릇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흔히 `비우고 살아라` 말을 하지만 비우고 살라는 것이 과욕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지 아무것도 담지 말라는 뜻은 아닐겁니다. 부와 명예,권력같은 것으로 담는 마음그릇은 과욕이 되기 십상이나, 얽히고설킨 인연줄에 메여 사는 세속적인 범부들의 삶이란 무엇으로 채우지 않으면 허기가 져서 살아가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채움이란 부,명예,권력이 아니라 부 대신에 여유를,명예 대신에 존재감을, 권력 대신에 사랑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채우되 한 가지로 가득 차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여러가지를 채웠을 때는 한 가지를 잃어..

living note 2012.01.03

친정가는 길에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하기로 하고 친정도 있고 외가도 있는 안동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야지 맘먹고 알람만 믿고 잤는데 그놈이 울지 않아서 그만 늦게 출발을 하게 되어 가는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나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아마 오전 설정이 오후로 돼있는 걸 몰랐던 것 같아요. 하필이면 비까지 내려서 가는 길에 야산들이 단풍이 참 좋았지만 선명하게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죠. 그리 멀지 않은 길인데, 예정대로 풍기로 빠져서 인삼을 몇 보따리 사고 안동한우로 점심을 먹고 소수서원으로 갔는데 마침 비도 그치고 해서 즐거운 맘으로 둘러보는데 역시 시간이 부족해서 그것마저 끝까지 다 보지 못했지만 마음은 오백 년을 거슬러 그때의 마음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은행나무가 오백 년의 역사를 지..

living note 2011.10.31

가을 아침의 묘사

하늘에서 가을이 내리는 아침이다. 언제나 잠이 고픈 나에게 간밤엔 끊김 없이 곤히 자고 나서 인지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어느새 아침햇살이 가득 들어앉아 그 투명한 빛으로 나를 감싸 안는다. 늦잠을 자도 딱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닌 나의 일상이 이렇게 온몸 가득히 햇빛을 몸에 두르고 시작하는데 간단한 샐러드 한 접시의 아침도 빛이 있는 식탁에서 첼로의 선률을 들으면서 맛있게 먹고 약간의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집 앞 뒤로 쭉~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이 품어내는 향으로 후식을 먹는다.연일 따끈따끈한 햇빛을 받아먹어서인지 나무들도 한 뼘이 나가지들을 위로 밀어 올려 잎들이 눈높이보다 위에서 나풀거린다. 물기 없는 가을바람이 살갗에 스미면 뜨겁던 여름 열고만 있던 땀구멍들을 이제는 닫아 두어도 된다는 듯 소슬한 ..

living note 2011.09.06

마음의 거리

내꽃밭 도라지 반야화 다가가는 거리는 즐거움에 지척이고 돌아서는 거리는 단장의 천만리라 마음의 거리는 찰나인데 어느세 거기인데 몸으로 가는 길은 왜 이리도 멀기만한지! 마음을 열면 우주를 담을 수 있지만 마음을 닫으면 바늘 조차도 꽂지 못하네 가야할 곳, 열린 마음인 줄 알면서도 내가 닫혔으니 아득히 멀기만한가? 멀어진 마음의 거리는 측량키도 어려워라 침묵하는 마음의 깊이는 내려가도 내려가도 닿을 길 없네. 가늠키 어려운 마음의 거리도 용서 하나로 열고 나면 거리도 깊이도 눈에 다 보이는 걸 그보다 더 가깝고 그보다 더 넓은 건 없다. 열고 살아라 나머지는 다 열고 살아라.

living note 2011.08.09

태풍이 지난 뒤

평화 뒤에는 언제나 희생이 뒤따르는가? 주말에 태풍이 지나고 가장 먼저 진관 공원이 걱정이 되었다. 작년에도 아까운 나무들이 너무 많이 수난을 당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 오늘 둘러보았더니 작년만큼 심하진 않았지만 학교 뒤에 수로 변에 나무들이 넘어져 길을 막았고 우리 공원의 주종인 참나무들이 새로 자란 순들이 얼마나 많이 부러졌는지 온 산이 시퍼렇게 덮여 있었다. 그뿐 아니라 부러진 가지들이 수로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앞으로 장마가 계속될 텐데 걱정이 된다. 그런데도 단지 내 수목들은 안전하게 잘 지탱해 준 것이 아마도 산이 막아 주었기 때문일 것 같아 참 고맙고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산을 위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외엔.......... 당분간은 그토록 좋아하는 숲 속..

living note 2011.06.28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고은 시인이 소년 소녀들을 위해 쓴 세상에서 가장 슬기로운 이야기 중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 세상에는 가장 강한 것이 12가지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돌이다. 그러나 돌은 무쇠로 때리면 깨뜨릴 수 있다. 그러면 무쇠가 가장 강한가? 그렇지 않다. 무쇠는 뜨거운 불에 들어가면 녹아 버린다. 역시 불이 쇠보다 강하다. 그러나 불보다 강한 것은 물이다. 불은 물로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보다 강한 것은 무엇인가? 그건 구름이다. 물은 증발하여 구름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구름보다 강한 것은 바람이다. 바람은 구름을 이리저리 날려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바람이 강하다지만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니 바람보다 강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보다 강한 건 두려움이다. 사람은 두려움 앞에서..

living note 2011.06.21

천국에 대한 불가지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노토노트`를 읽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과 `개미`를 읽었었다. 기발한 상상력과 호기심으로 어릴 때부터 개미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서 결국에는 책으로 펴 낼 수 있었던 작가의 끈질긴 탐구력이 독자들의 호기심까지 발동하게 만드는 유명 작가인데 감히 신의 영역인 천국을 탐험한다는 내용이 궁금해서 읽지 않을 수 없었던 책이다. 타나토 노트란 그리스어로 저승을 항행하는 자란 뜻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듯이 사후세계에도 분명 경이로운 어떤 대륙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하고 마취과 의사인 미카엘 팽송과 친구인과학연구소 생물학 연구원인 라울 라조르박이 영적 세계를 탐험하는 내용이다. 과연 우리가..

living note 2011.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