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286

지금 이순간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 이 고운 순간을 잡고 싶어 절규의 소리가 속에서 울리다가 밖으로 터져 나온다. 그냥 당연한 거라고, 가을은 원래 이래,라고 지나치지 못하고 이 순간에 매달리는 건 다가올 시커먼 겨울을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다.가을 풍경이 예쁘게만 보이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저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잘 견디어냈기에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조용히 사라져 간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잎들도 말짱하지 않다. 벌레들의 입자국도 있고 멍도 들었지만 그조차 곱게 물들이며 받아들이는 착한 나무들이다. 어쩌면 나무들은 한 해 살이를 최선을 다해 살아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그들의 삶에 후회가 없는 것이겠지. 나도 인생의 절기가 가을인데 저만큼 곱게 살아내지 못한 것 같아 후회가 인다.자연은 마지막 순..

living note 2024.11.15

탄천 수변공원

지난여름 너무 뜨거워 그늘이 없는 강변길은 잘 가지 않다가 가을이 되니 햇빛 받으며 걷는 것도 참 좋았다. 우리 집에서 탄천은 걸어서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다. 탄천 분당구간은 사계절이 아름다운 곳이어서 늘 운동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저마다 운동하기에 여념이 없다. 탄천은 용인 구성에 있는 법화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한강 청담대교 밑으로 흘러드는 약 35.6킬로미터의 하천이다. 지난해는 내가 늘 산책하는 이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서 물길 따라 한강까지 이틀에 걸쳐서 완주를 했다. 여러 동내를 지나면서 이쪽저쪽을 이어주는 교량이 70개나 되고 지류도 여러 개가 있었다. 그중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세곡천, 양재천도 탄천의 지류라는 걸 알았다. 이름 모를..

living note 2024.11.14

수원화성의 가을나들이

어떤 계절이 시작되거나 떠나갈 때도 도심 속에 있는 수원화성을 찾는다. 가까워서 느긋하게 성길을 따라 산책하기에 참 좋다. 올해 초 첫눈을 맞으며 걸었던 그 길에 가을을 배웅하러 다시 찾았는데 어쩐 일인지 봄이 시작되는 듯했다. 성곽 아래는 제비꽃, 민들레 등 작은 풀꽃이 피어나고 철쭉도 꽃송이를 달고 있어서 가을 억새와 봄꽃이 상충하는 모호한 시간 속을 걸었다, 나의 인식세계는 나로부터 열린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있기 이 전의 시공간은 나의 인식 밖이기 때문에 지식으로만 알 수 있다. 방대한 역사적 시공간은 존재의 유무가 쉽게 와닿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탔을 때 너무 넓은 하늘을 날고 있는 너무 빠른 속도를 느낄 수가 없다. 탈 것 중에 가장 빠른 탈것이 마치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듯..

living note 2024.11.13

왕들의 정원(동구릉)

조선의 축소판 같은 사후세계 왕들의 정원인 만추의 그림 속으로 낙엽을 밟으며 가을길을 걸어본다. 지난 오월에 처음으로 동구릉을 찾았을 때는 능을 위주로 살펴보면서 걸었다. 동구릉의 상징이라면 역시 태조의 건원릉 능침에 피어 있을 억새를 보는 것이다. 그건 가을에 와야 제격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건원릉의 억새꽃과 정원의 가을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월에는 떼죽과 쪽동백의 하얀 꽃무리가 능원에 향기를 뿌리더니 다시 찾은 가을의 능원은 고운 단풍과 낙엽이 깔린 곳에 발자국이 하얗게 남겨진 길을 걷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멜랑콜리한 운치가 있어 조용한 정념이 이는 가을길이 너무 좋았다. 신에 대한 불가지론은 철학의 궁극으로 남겨진 논리의 난점이지만 논리를 떠나 누구나 신에 대한 상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

living note 2024.11.09

통영의 아름다움

부산, 거제, 통영은 같은 바다를 공유하며 땅을 나누어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국토의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해양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있다. 부산 강서구를 지나가는 통영행은 말로만 듣던 거가대교를 통과하는데 그 아래 저도를 지난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대교는 40분 만에 두 도시를 연결한다고 한다. 깊은 해저를 지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구간 일부를 투명하게 해서 심해를 느껴볼 수 있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마음속으로 그리던 통영은 무척 아름다운 풍경인데 어디에서 내가 그린 그림을 만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통영시장을 둘러보고 동피랑으로 올라갔는데 날씨가 너무 뜨거워 한여름 같았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랑(벼랑)이라는 뜻이다. 올라가 보니 서피랑은 마을이 아닌 동..

living note 2024.10.21

가을여행(부산)

가을맞이 여행을 부산에서 시작한다. 부산에는 작은딸이 살고 있다. 멀리 있는 딸을 찾아간다는 것은 마치 키우던 화초를 분양해주고 나서 화초가 잘 크는지 꽃은 피는지를 살피러 가는 것 같다. 나를 떠난 화초는 내 꽃밭에 있을 때보다 더 튼실한 줄기에 무성한 잎을 달고 화사한 꽃을 피우며 만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산역에 내려섰더니 날씨는 지난여름의 뜨겁던 꼬리를 아직도 다 끊어내지 못하고 가을을 들여놓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을여행은 설악으로 먼저 갔었는데 반대로 가을이 끝나는 부산에 먼저 갔으니 내가 틀린 거지 부산은 여느 때와 다른 건 아니었을 것 같다. 딸이 있는 부산을 기점으로 그동안 미루기만 했던 통영과 거제를 돌아보고 가을산행의 대미인 영남알프스 중의 한 곳인 밀양 천황산으로 ..

living note 2024.10.21

상사화의 계절

2024년의 여름은 기록할만하다. 한 달간의 장마, 한 달 반의 혹서, 이 엄청난 날들을 이겨내고도 제철을 잊지 않고 곱게 피어난 꽃무릇과 상사화는 꼭 봐야 한다. 그동안 붉은 물감의 바탕을 이루는 거대한 군락지인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울산 대왕암공원에서 무척 잘 봤는데 남쪽지방이 생육조건이 좋은건지 아래지방에서 많이 본 셈이다. 그 붉은 꽃무리 속으로 들어가면 내 얼굴도 붉게 물들어 가는듯했다. 그렇다고 해마다 그곳을 찾지는 않는다. 가장 싱싱하고 화려할 때 봤던 고운 모습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다. 같은 장소라고 언제나 같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기억에 흠집을 내고 싶지가 않다. 그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보고 싶을 때 나의 기록을 찾아보면 된다. 올해는 하얀 꽃무릇이 있다고 해서 찾아..

living note 2024.09.20

부산의 이모저모

광안리바다의 낮과 밤, 부산 어린이대공원, 옥련정사, 직장인이 일 년을 기다리는 하기휴가, 나도 그런 날이 있었다. 지금은 매일이 휴가 같아서 무의미한 여름이지만 이번에 부산에서 바다로 들어가 놀아봤더니 지난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하기휴가를 보내는 기분이었다. 물은 따뜻하고 몸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타면 몸이 가볍게 뜨는 순간이 어린아이처럼 재미있었다. 파도에 떠밀릴 때는 힘없이 뒤로 넘어지기도 하면서 한나절을 보내고, 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모여들어 광안리해변은 밤마다 축제가 열리는 시간 같았다.주말 밤마다 열리는 드론쇼.열나흘 달이 휘영청 밝은데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아 나만 밤바다를 걸으면서 달빛과 대교의 불빛이 바다에 일렁이는 빛을 뿌리고 있는 밤바다를 즐겨 바라보았다.부산 어린이 대공원에 ..

living note 2024.08.19

보고싶으면 봐야지

유례없는 더위에 복자부동만 하고 있으면 제철에 봐야 하는 것들을 못 보고 놓치게 된다. 그래서 떠난 여행길, 더위에 몸을 적시며 잠재된 지난겨울의 설경을 꺼내어 대비되는 마음으로 눈 내리던 혹한을 떠올리며 태양에 맞서 경주를 거쳐 부산까지 갔다. 경주남산에서 먼저 부모님 산소에 인사드리고 단정하게 다듬어드린 다음, 보라색 바탕색에 굴곡이 멋이 된 소나무를 보기 위해 황성공원으로 달려갔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공원에는 고목의 울창한 숲이 불줄기 같은 빛을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조금 들어가니 보라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린 것이 꽃인데 하필이면 이렇게 뜨거울 때 피어서 나를 불러내는지...... 지난해 경주 황성공원에서 봤던 맥문동꽃과 유엔공원에서 보았던 배롱나무를 만나기 위해 경주와 부산으로 갔는데 같은..

living note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