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축소판 같은 사후세계 왕들의 정원인 만추의 그림 속으로 낙엽을 밟으며 가을길을 걸어본다.
지난 오월에 처음으로 동구릉을 찾았을 때는 능을 위주로 살펴보면서 걸었다. 동구릉의 상징이라면 역시 태조의 건원릉 능침에 피어 있을 억새를 보는 것이다. 그건 가을에 와야 제격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건원릉의 억새꽃과 정원의 가을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월에는 떼죽과 쪽동백의 하얀 꽃무리가 능원에 향기를 뿌리더니 다시 찾은 가을의 능원은 고운 단풍과 낙엽이 깔린 곳에 발자국이 하얗게 남겨진 길을 걷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멜랑콜리한 운치가 있어 조용한 정념이 이는 가을길이 너무 좋았다.
신에 대한 불가지론은 철학의 궁극으로 남겨진 논리의 난점이지만 논리를 떠나 누구나 신에 대한 상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는 아홉 분의 왕과 왕후의 능이 15개의 봉분이 모여 있으니 사후 조선의 축소판이라 할만하지 않는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낮에는 후세들의 공원이 되지만 밤이 되면 신들의 공원이 되어 왕과 왕비가 나란히 손잡고 산책을 즐기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삶과 죽음의 공존이 있는 색다른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까아만 밤에 하얗게 정체를 드러내며 소곤소곤 말소리까지 들리는 듯한 왕들의 정원을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생전에 치열했던 삶과 치국의 괴로움을 다 털어버리고 사후세계는 오직 못다 한 숭고한 사랑을 나누며 능원을 산책할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오르는 그런 곳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로는 일체 음식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게 한다. 지난번 능을 위주로 살펴볼 때는 모르고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가을풍경을 즐기며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원 한쪽에 마련된 쉼터가 보였다. 그곳에는 여러 개의 식탁이 마련되어 있는 걸 보면 간식과 커피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배낭의 필수품처럼 들어 있는 그것들을 꺼내서 살이 델 듯 따가운 가을빛을 받으며 커피 한 잔으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더 깊숙이 들어가서 여러 군데 흩어져 있는 능들을 통과하고 건원릉으로 갔다. 건원릉에는 생각했던 대로 억새꽃이 하얗게 하늘거리며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건원릉 뒤에는 선조의 릉인 목릉이 있어서 그곳까지만 보고 밖으로 나가는데 단풍이 얼마나 곱게 물들었는지 밝은 빛의 조명까지 더해지니 가을색채의 끝을 보는 것 같았다. 바깥쪽으로 더 내려오면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입구 쪽에 샛노랗게 갓 떨어진 은행잎이 때도 묻지 않고 너무 이뻐서 사진 한 컷을 남기고 나오니 가을에 봐야 하는 그림들인 단풍, 억새, 은행잎,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어서 공허할 수 있는 마음밭을 아름답게 채색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왔다.
출입구의 단풍
제실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숭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유일하게 팔작지붕의 정자각이 보물로 지정된 것.
혜릉, 경종의 정비였던 단의 왕후의 능
수형이 멋진 팥배나무열매가 빛이 잘 드는 곳에서 꽃보다 이쁘게 달려있다.
철없는 꽃사과나무가 하얀 꽃을 피웠다.
낙엽 속의 하얀 길이 그려진 풍경
쉼터가 있는 곳의 억새와 빈가지도 보기 좋은 가을풍경
건원릉,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은 태조의 능이다. 억새가 베어지기 전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건원릉의 줌
선조의 목릉
선조의 계비 인목황후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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