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19

하얀색 얼레지에 반한 날

꽃 한 송이에 굴종한 하루였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법이다. 나는 처음으로 만난 하얀색 얼레지를 보고 얼레지한테 지기로 결심하고 세 시간을 기다리며 그 앞에 엎드렸다. 내가 선택한 아름다운 굴종이다. 얼레지는 꽃을 좋아하고 아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작고 가녀린 꽃이다. 분홍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그곳에 관찰력이 좋은 우리의 눈에 발견된 하얀 얼레지 딱 한 포기가 있었다. 처음 봤을 때 입을 꼭 다물고 있어서 너무 아쉬웠는데 한 친구가 기어이 꽃잎이 활짝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고 했다. 지금 못 보면 다시 못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이 점점 꽃잎을 열 때까지 세 시간이 걸렸고 우리는 결국 활짝 열린 하얀색 얼레지를 고이 담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던 것을 보게 되는 ..

야생화 2024.04.10

분홍 얼레지

해마다 봄이면 노루귀를 본 후 얼레지를 만난다. 이렇게 이쁜 꽃에다가 바람난 여인이란 별명을 붙인 게 못마땅하다. 꽃잎을 활짝 열어 속을 다 보여주는 게 인간의 눈으로 보니까 다소 만망함 때문일 거다. 인위적으론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이런 색감을 나타낼 수 없을 거다. 아니 자연을 능가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자연은 자연답게. 저마다 그답게 살아갈 때가 가장 좋은 삶이다.

야생화 2024.04.10

보미양, 노루귀

어디에 가면 만나는지 알고 가는 길은 설레임이다. 그때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봄이 갓 낳은 아가 같은 노루귀가 하늘거리고 있었다. 너무도 여리고 작은 앙증맞은 꽃대 앞에서 오늘도 나는 굴복한다.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무릎 꿇는 건 못난 짓이지만 무수한 목숨을 끌어안고 혹한에 맞서며 그 많은 목숨 지켜낸 대지와 여린 목숨 앞에 한없이 몸을 낮추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굴복할 줄 아는 것은 대지에 기대어 사는 나 또한 같은 생명으로써 감사를 표하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대지의 모성이 온기를 느끼자마자 땅 위로 가장 먼저 밀어 올린 여린 목숨이 노루귀다. 노루귀를 만나야 비로소 봄이 왔음을 인식하게 되고 새봄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 이즘에는 연중행사처럼 노루귀를 찾아 나..

야생화 2023.03.17

이른봄 야생화

노루귀를 보려는 일념으로 메마른 산길을 가는데 언뜻 보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것, 꽃인 듯 아닌 듯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이 색상조차 드러나지 않게 작은 것이 올괴불이다. 이 꽃도 참 일찍 나온다. 이 꽃은 작으면서 색이 곱지 않아 무심히 보면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을 찍으면 놀라울 만큼 이쁘다. 그래서 자꾸만 여러 모습으로 찍게 되는 재미를 준다. 사소롱고에서노란 올괴불,세체다에서수리사,2024.4.19올괴불요렇게 작은 꽃이 올괴불 꽃이다. 진달래도 피었고 제비꽃 현호색아, 이거 개암나무꽃, 올해 처음으로 꽃 피운다는 걸 알았고 처음 보았다.산수유마로니에꽃,낱낱이 떨어진 꽃잎이 이렇게 이쁜데 이것이 한 송이에 붙어 있을 때는 나무도 높고 이쁘게 보이지 않았다.생강나무꽃개암나무꽃, 너무 작아서..

야생화 2023.03.17

천마산 야생화

세 차례의 야생화 풀꽃을 찾아다니면서 천마산에서 보고 싶은 꽃을 잘 봤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천마산 야생화는 찾지 않기로 하고 넷이서 동시에 발도장으로 마침표를 콱 찍었다. 이 작은 풀꽃이 뭐라고 꽃에 대해 할 말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거듭거듭 쓰게 되니, 마음이 냉동된 채 살아가는 게 아니라면 무엇을 보고 느끼고 했을 때 그걸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생각의 포만감으로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마음을 쏟아내어 적어놓게 된다. 작은 풀꽃은 함부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런 걸 억지로 담기 위해서는 엎드리고 드러눕고 온갖 자세를 다 취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꽃 사진 찍고 나면 다음 날 몸살이 난다. 셔터를 반 누르..

야생화 2022.04.10

도도한 꽃의 여왕 (화야산)

얼레지, 또다시 그녀 앞에 엎드렸다. 도도한 그녀, 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사방에서 모여들어 스스로 굴복하는 인간들에 얼마나 우쭐했을까. 산이라고 다 있는 꽃이 아니다. 이토록 도도하고 이쁜 것들은 아무 데나 살지 않는다. 일급수가 흘러내리는 계곡이 있어야 하고 바람골이 있어야 되고 볕도 잘 찾아들어야 하는 조건을 갖쳐야 터를 잡는다. 터가 마련되면 마음껏 종족을 퍼뜨려 일대 장관을 이루며 그들만의 밭을 이룬다. 지난해에 이어 찾아갔는데 조금 때가 조금 이른 탓에 이제 막 이파리를 하나씩 들어 올리는 자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연히 본 꽃들이라면 찾아가지 않았겠지만 거기에 지금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끄달려 가게 된다.

야생화 2022.03.31

설중 노루귀

눈과 꽃과 내가 하필이면 오늘 절묘한 만남이 있었던 건 오고 감이란 아무도 막을 수 없음에서 비롯되었어. 눈이 온다고 꽃이 피는 걸 말릴 수 없고 꽃이 피는데 눈을 오지 말라고 막을 수 없듯이 그곳에 꽃이 있는 걸 알고 가는 나를 또한 누가 막을 수 있단말이냐. 너무도 아름답고 청순하고 가련한 만남이었어. 예측 불가능한 것, 법칙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신의 행위라고 하는데 눈 속에서 노루귀를 본다는 거 이건 정말 신의 행위였다. 삼월 하순에 그 여린 것이 눈 속에서 그토록 이쁘게 가녀린 몸으로 떨고 있을 줄이야, 철 없이 나왔다가 화들짝 놀랐을 여린 꽃대가 너무 애처로웠다. 무거운 춘설에 짓눌려서도 제 색을 잃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게 숨어 있었던 꽃을 발견하는 것도 꽃을 좋아하는 심미안이 없으면 ..

야생화 2022.03.21

노루귀의 권력

노루귀는 이쁜 것이 권력이다. 노루귀 앞에서는 모두가 엎드렸다. 그 이쁘고 앙증맞은 작은 것 앞에서 무엇을 바라며 엎드려서 아부를 하는지 "제발 흔들리지 말아 다오"이렇게 애원하며 여린 권력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공들여 모셔오고 나면 그제야 봄이 온 걸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인간 세는 병들어도 자연의 힘은 삶의 항체가 어떤 방해에도 다 당해내기 때문에 해마다 그 꽃자리에 찾아가면 언 땅 뚫고 쌓인 낙엽 헤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검은 산천을 아름다움 한 점으로 봄의 시작을 알린다. 흙은 생명의 용광로 같다. 꽃피고 잎 피고 푸르던 온갖 생명을 하나의 흙으로 녹여 한해살이를 끝내는 것 같더니 그 차가운 흙에서 녹여졌던 모든 생명이 다시 솟구치는 걸 보면 신비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 같아 봄을..

야생화 2022.03.16

가을 야생화

봄꽃에 기죽어 작게 피는 가을 야생화, 봄꽃은 나무에서 태어나고, 가을꽃은 풀숲에서 태어난다. 봄꽃은 마음을 들뜨게 하고 풀꽃은 마음을 차분하게 조절한다. 봄꽃은 움츠렸던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어 꽃 따라 흐르게 하고 가을꽃은 날아다니던 마음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아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봄꽃은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절로 보이고, 가을 풀꽃은 애써 봐야 꽃인 줄 알게 한다. 용담, 은꿩의 다리, 짚신나물, 이삭여뀌. 고마리, 여뀌, 진범, 구절초, 짚신나물, 개미취, 참취, 투구꽃, 용담, 강활, 물봉선, 등 어여쁜 꽃이지만 꽃자를 빼고 풀이름으로 먼저 불려지는 서러운 꽃이다. 작은 풀꽃들이 스러지면 계절의 마지막 눈꽃이 스러져 누운 꽃무덤에 하얗게 봉분을 만들지. 하얀 봉분 속에는 모든 씨앗이 잠들게 하..

야생화 2021.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