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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정원(동구릉)

조선의 축소판 같은 사후세계 왕들의 정원인 만추의 그림 속으로 낙엽을 밟으며 가을길을 걸어본다. 지난 오월에 처음으로 동구릉을 찾았을 때는 능을 위주로 살펴보면서 걸었다. 동구릉의 상징이라면 역시 태조의 건원릉 능침에 피어 있을 억새를 보는 것이다. 그건 가을에 와야 제격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건원릉의 억새꽃과 정원의 가을을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월에는 떼죽과 쪽동백의 하얀 꽃무리가 능원에 향기를 뿌리더니 다시 찾은 가을의 능원은 고운 단풍과 낙엽이 깔린 곳에 발자국이 하얗게 남겨진 길을 걷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멜랑콜리한 운치가 있어 조용한 정념이 이는 가을길이 너무 좋았다. 신에 대한 불가지론은 철학의 궁극으로 남겨진 논리의 난점이지만 논리를 떠나 누구나 신에 대한 상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곳..

living note 2024.11.09

한라산 영실

왠지 덤으로 얻은 산행 같다. 예정에도 없던 일정을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 영실 갈까" 하는 이 한마디에 우리는 산으로 갔다. 2014년 10월 중순에 찾았던 영실풍경이 스치면서 갑자기 변경한 일정이 자칫 놓칠 뻔했던 한라산 영실코스를 가게 되어서 너무 잘 한 선택이었다. 적기보다 약 열흘정도 늦었지만 아직 산 아래는 단풍이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높고 낮음이 가을을 맞는 시기가 다르다. 가을은 시간을 먹는 괴물인가, 하루에 며칠을 먹어치우는 것 같다. 가을인가 싶으면 바로 겨울이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바쁜지 따라가기가 힘겨울 정도다. 제주에는 갈 곳이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제쳐놓고 제주를 논하지 않는다. 어느 카페가 뷰가 좋은지, 어느 식당이 맛이 좋은지는 관심이 없다. 다만 한..

등산 2024.11.01

제주, 삼다수숲길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상이 자연일 때가 가장 순수하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그리움은 때론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기다림은 상처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자연은 어느 누구의 특정 대상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자의 대상이 되어준다. 자연은 그냥 있어주기만 한다. 치장하지 않아도 예쁘고 새파랗게만 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그것이 무위의 자연이다. 얼마나 좋은가, 자연의 심성이. 오랜만에 그리운 제주의 숲을 찾아간다. 올레길을 두 번 완주하기 위해서 또는 산과 숲을 찾고 싶을 때 부단히 쫓아다니던 제주를 한동안 가지 못하다가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나와 똑같은 친구들의 만남이 제주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 제주로 가면 이야기가 참 많아서 좋다. 길지 않은 일정이지만 심신 가득 채우고 오는 여행이다. 제..

제주의 사계 2024.11.01

밀양 천황산,제약산

은은한 초가을의 색채를 깔아놓았을 것 같은 그 푸근하던 억새의 평원으로 간다. 부산에서 아침 아홉 시 12분이 된 시계를 보고 출발했는데 약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밀양 천황산이 제철을 맞아 등산객이 많이 모였을 줄 알았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한 줄을 서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평일이어서인지 줄은 서지 않았고 십 분 만에 천황산에 도착했다. 평지보다는 바람이 조금 쌀쌀했지만 걷다 보니 금방 몸이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천 미터가 넘는 산 정상을 향해가는 발걸음이 즐거웠던 건, 옆에 산을 좋아하는 딸 부부를 동행하고 가면서 많은 걸 함께 얘기하고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다. 기억은 변함이 없는데 현상은 늘 변하는 거구나. 표충사를 보고 사자평까지 올랐던 너무 오래된 기..

등산 2024.10.22

통영의 아름다움

부산, 거제, 통영은 같은 바다를 공유하며 땅을 나누어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국토의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해양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고 있다. 부산 강서구를 지나가는 통영행은 말로만 듣던 거가대교를 통과하는데 그 아래 저도를 지난다. 부산과 거제를 잇는 대교는 40분 만에 두 도시를 연결한다고 한다. 깊은 해저를 지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구간 일부를 투명하게 해서 심해를 느껴볼 수 있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마음속으로 그리던 통영은 무척 아름다운 풍경인데 어디에서 내가 그린 그림을 만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통영시장을 둘러보고 동피랑으로 올라갔는데 날씨가 너무 뜨거워 한여름 같았다. 동피랑은 동쪽에 있는 비랑(벼랑)이라는 뜻이다. 올라가 보니 서피랑은 마을이 아닌 동..

living note 2024.10.21

가을여행(부산)

가을맞이 여행을 부산에서 시작한다. 부산에는 작은딸이 살고 있다. 멀리 있는 딸을 찾아간다는 것은 마치 키우던 화초를 분양해주고 나서 화초가 잘 크는지 꽃은 피는지를 살피러 가는 것 같다. 나를 떠난 화초는 내 꽃밭에 있을 때보다 더 튼실한 줄기에 무성한 잎을 달고 화사한 꽃을 피우며 만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산역에 내려섰더니 날씨는 지난여름의 뜨겁던 꼬리를 아직도 다 끊어내지 못하고 가을을 들여놓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가을여행은 설악으로 먼저 갔었는데 반대로 가을이 끝나는 부산에 먼저 갔으니 내가 틀린 거지 부산은 여느 때와 다른 건 아니었을 것 같다. 딸이 있는 부산을 기점으로 그동안 미루기만 했던 통영과 거제를 돌아보고 가을산행의 대미인 영남알프스 중의 한 곳인 밀양 천황산으로 ..

living note 2024.10.21

남한산성 성곽 둘레길

가을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어. 유례없는 더위를 오래 겪으면서 가을이 아예 없어진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역시 가을은 푸른 창공 저 넘어 이디엔가 침묵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가봐. 봄은 땅에서 솟아나고 가을은 하늘에서 내린다고 생각되는 건 하늘이 먼저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더 높아 보이고 더 푸르고 금빛이 쏟아지면 가을이 오는 징조가 된다. 봄은 언 땅이 녹으면서 생명이 솟구치고 나무들은 눈 녹은 땅에서 습기를 힘차게 길어 올리며 눈을 뜨고 좀 더 상쾌한 봄기운을 느끼게 된다. 늦게 온 가을은 분명 짧아질텐데 벌써부터 마음이 바쁘고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늘어선다. 머무는 시간보다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을을 쫓아다녀야지 다짐하며 높..

등산 2024.09.26

상사화의 계절

2024년의 여름은 기록할만하다. 한 달간의 장마, 한 달 반의 혹서, 이 엄청난 날들을 이겨내고도 제철을 잊지 않고 곱게 피어난 꽃무릇과 상사화는 꼭 봐야 한다. 그동안 붉은 물감의 바탕을 이루는 거대한 군락지인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울산 대왕암공원에서 무척 잘 봤는데 남쪽지방이 생육조건이 좋은건지 아래지방에서 많이 본 셈이다. 그 붉은 꽃무리 속으로 들어가면 내 얼굴도 붉게 물들어 가는듯했다. 그렇다고 해마다 그곳을 찾지는 않는다. 가장 싱싱하고 화려할 때 봤던 고운 모습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다. 같은 장소라고 언제나 같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기억에 흠집을 내고 싶지가 않다. 그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보고 싶을 때 나의 기록을 찾아보면 된다. 올해는 하얀 꽃무릇이 있다고 해서 찾아..

living note 2024.09.20

자연학교 개학날

우리들은 같은 마음으로 한 곳을 바라보며 생의 후반기를 자연학교에서 배우고 지혜를 얻고 있는 학생들이다. 우리의 교정은 끝이 없다. 선생님은 너무 많지만 말로 가르치지 않는다. 말없이 가만히 보여주기만 하고 우리는 그 모습에서 관찰하고 즐기다 보면 절로 알아지는 지혜가 생기게 되는 무위의 진리를 배워가는 학생들이다. 대신 졸업은 언제든 할 수도 있지만 영원히 안 할 수도 있다. 생이 끝나도 그곳, 자연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래서 더욱 자연과 가까워지고 친해져야 언젠가는 오고야 말 끝이란 게 두렵지 않게 된다. 인생 전반기는 교육으로 지식을 얻었고 후반기는 우리처럼 자연에서 진리와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가장 잘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꽃을 보면 이름을 알고 싶고 이름을 알고 나면 더욱 친해지고 이뻐..

등산 2024.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