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난 팔불출이라도 좋아

반야화 2014. 9. 2. 13:56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 했던가? 그러나 기꺼이 팔불출을 자처하며 딸 자랑을 하고 싶은 날이다. 왜냐하면 내가 잘한 일이라곤 두 딸 잘 키워 놓은 것뿐이라서 자랑할 거라곤 그것밖에 없다.

 

장마도 지나고 어느덧 가을바람이 느껴지는 날이어서 집안 곳곳을 열어젖히고 습기도 말리고 환기를 시키느라고 열었는데 뭔지도 모를 상자들이 있어서 다 열어 정리를 하던 중에 길게는 30년이 고이 잠들어 있는 내 정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큰애와 작은애의 상장 상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받은 상장과 졸업장 성적표가 고스란히 모아져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이사를 하고 버린 짐도 많은데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에 기쁘고 이젠 세월이 아까워서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주인한테 넘겨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

 

정리를 해보면

큰딸 꺼: 학력고사, 중간고사, 모의고사, 정근, 개근, 각종 경시대회, 임명장, 성적표, 표창장이다.

도 주관, 시 주관 학력고사, 중간고사, 모의고사, : 우수상 58장

학급 회장, 부회장 임명장 : 6장

표창 : 1장

저축: 2개

각종 경시대회, 독후감, 미술, 웅변, 글짓기, 언어, 산수, 과학 수학올림피아드의 우수상이 있었다. 표창장은 학교를 빛낸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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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딸 꺼

도 주관, 시 주관 학력고사, 중간고사, 각종 경시대회, 저축상, 퀴즈 대화, 백일장, 등이 있었다.

학력고사 우수상:44장

각종 경시대회:8장

임명장:5장

저축상:2장

종합해보면 큰 딸이 더 많은 상을 받았다. 큰애는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며 주관이 뚜렷했고 공부 방식은 좀 달랐다. 큰애는 시험기간에는 전체를 공부했고, 작은애는 단시간에 요점만 공부했다. 둘 다 성적표는 거의가 수였고 우는 가뭄에 콩 나듯이 단 몇 개가 있었으며 둘 다. 상위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큰애가 중2, 작은애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 그 당시 그 유명한 강남 8 학군으로 전학을 왔는데 위장전입이 많던 시기여서 교육청에서 확인 방문을 거쳐 무사히 전학을 했는데 큰애는 삼성동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개월 수가 부족해서 고등학교는 강북으로 가게 되어서 한양여고를 다녔고, 작은애는 다행히 고등학교를 강남에 배정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강남의 교육열은 너무 대단해서 우리는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지만 그런 환경이 적응도 안 되었다. 처음에 전학 올 때 직접 서류를 들고 갔었는데 마치 장사꾼들이 좋은 물건 들어왔다고 좋아하듯이 단임 선생님이 우수한 학생 받았다며 너무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막상 전학시키고 나니까 못 따라갈까 봐 무척 걱정이 되었는데 하필이면 바로 시험기간이어서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동안 쌓아 온 평균점수는 까먹지 않았던 것 같고 둘째가 첫 시험에서 반에 4등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걱정했던 거에 비하면 무척 잘 치렀다. 그래서 우리 모녀는 손잡고 방안을 뺑뺑 돌면서 춤을 추었다. 그 후는 아무래도 영어와 수학에서 좀 처지더니 조금 지나니까 다시 성적이 향상되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은 둘 다 특채로 들어가서 남들이 겪는 입시 걱정도 안 했고, 대학 4학년 때 둘 다 취업을 했으니 남들 다 겪는 취업 걱정도 안 했으니 난 공짜로 아이들을 키운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대학생일 때는 장학금도 여러 번 받아서 4년 동안에 들어간 등록금이 둘 다 8백만 원 정도 들었다. 강남에서 유일하게 우리 딸은 유명 학원이나 과외공부도 별로 안 했다. 왜냐하면 과목당 한 달에 백만 원씩 하는 걸 지방에선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이어서 선뜻 투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원망 들을까 봐 큰딸을 수능을 치른 후에 논술 준비를 해야겠다 싶어서 논술학원에 보냈는데 한 달도 안 되는 날짜인데 50만 원을 주고 며칠을 다니더니 선생님이 가르치는 게 맘에 안 든다면서 차라리 혼자 하겠다면서 50만 원을 환불받아왔길래 그냥 웃었다. 그전에 처음 강남에 와서 혹시 뒤처질까 봐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학원에 등록하려고 새벽 2시까지 줄을 서서 기다린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한 반에 학생이 너무 많아서 뒤에는 들리지도 않는다면서 또 그만두었다.

 

둘째는 집에서 수학 과외를 한 달 정도 받았는데 역시 아이가 싫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그러고 보면 강남 사람들 흉내만 냈지 제대로 과외공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 교육방송은 열심히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잠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나만을 위한 시간을 즐기고 있지만 한창 아이들 공부시킬 땐 내조와 자식밖엔 모르고 살았다.

 

이렇게 자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는 누구나 상장도 많이 받고 공부도 잘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순간에 그친 것이라면 자랑거리도 아니지만 우리에겐 끝까지 이어져 지금은 두 딸이 고시 시험만큼이나 어렵다는 대기업에서 중간간부로써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엄마로선 참 자랑스럽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생활도 잘하고 시부모님한테도 사랑을 많이 받는다. 어제는 고부간에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딸이 없는 시어머니께  모녀 같은 여행이 필요하다면서, 작은애도 고르고 고르다가 이미 너무 늦었지만 드디어 자기의 이상형을 만났다면서 결혼약속을 했으니 이제야말로 내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 앞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엄마 정성에 비해 스스로 잘 커준 딸들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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