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남겨놓고 떠난 향기는 아직 있었다.
수확이 다 끝나고 아무것에도 피해를 주지 않는 비는 착한 비다. 지난주만 해도 푸석푸석한 먼지가 싫었는데 겨울가뭄에 완전 해갈이 되는 비가 많이 내렸나 보다. 때마침 가장 늦게 낙엽이 지는 낙엽송 바늘잎이 많이 떨어져서 바닥을 꼼꼼히 덮어 노란 길을 만들었고 길 옆 산에도 푸른 소나무 속에 드문드문 낙엽송 단풍이 보기 좋게 섞여 있어 가을이 떠나면서 채색이 끝난 뒤 마지막 물통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오르는 길에는 노란 바늘잎이 카펫처럼 깔려 있어서 걷기에도 아주 편했다. 흙에 섞이면 생명 있는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간다. 가을은 부엽토를 만들고, 또한 가을은 생명을 길러내는 모태가 되어주기도 하는 자연의 순환 위를 걷다 보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는 저마다의 질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을 오르는 초입에는 거두어들일 일손이 없어 포기해버린 듯한 빠알간 감이 탐스럽게 달려 있는 게 꽃보다도 이쁘다. 한꺼번에 다 따는 수고로움 보다 자연적으로 홍시가 되어 떨어지는 걸 받아먹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 같으면 감나무 밑에다가 푹신한 깔판을 깔아 둘 것 같은데 그냥 버려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초겨울의 산은 무심하다. 아무것도 길러내지도 않고 꽃 피우지도 않고 물들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많은 변화를 주었던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이듬해에 되풀이되는 소생과 절정과 결실을 위한 에너지 충전 시간일지도 모른다. 비록 삭막한 풍경일지라도 기다리면 온다는 진리를 깨달았으니 잠든 산천의 숙면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는 없지만 무엇을 내어놓으라는 투정은 부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나목은 이름도 성도 다 떨쳐버려 그들이 누구인지 인지하지 못한다.
처음엔 좋던 길을 한참 오르니 검은 진흙이 신발 바닥을 다 메워버려 너무 미끄럽다. 낙엽은 그 검은 바닥을 감추고 있어 더욱 불안하게 걷게 되었다. 진흙길을 힘들게 걸으면서 마른땅을 찾아 점심을 먹으려 해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는데 산이라면 전지전능의 수준인 이 대장님께서 산성 밑에 좋은 밥상이 있다고 해서 거기까지 갔더니 아주 멋진 자리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산성을 복원했는데 너무나 튼튼한 난공불락의 산성이면서 경치 또한 너무 좋았다.
맛있는 점심이 끝나고 남보다 먼저 정상으로 올라서 줄을 서지 않고 사진을 찍었는데 더 머물 수 없도록 바람이 심해서 먼저 내려와 이어진 산성을 따라 조용히 혼자 앞서 걸었다. 성곽이 끝나는 지점까지 걷다가 홀연히 뒤돌아 보았더니 깜짝 놀랄만한 정상의 다른 모습이 있었다. 마치 한라산의 삼각봉 같았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것 같은 것도 같았다. 성터 어디엔가는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황석산 뾰족한 봉우리가 검은 구름을 터뜨려 비를 자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이 되기도 하는 석침 같았다.
멋진 산봉우리를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 보면서 여유 있는 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다시 일행이 모여 성곽에서 이어진 길을 걷다가 정상에서 내려서는데 길이 너무 가파른 데다가 잔설도 있고 미끄러워서 작은 실수만 있어도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무척 겁을 먹었다. 겨울에는 그런 길은 다신 가고 싶지 않았다. 그 험한 구간을 다 냐려오니까 외재까지 가는 길은 잠시 낙엽송이 깔린 작은 오솔길이 고생했다며 그 충격을 다 흡수해 주었다. 외재에서 하산길로 들어선 건 지나고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짧아서 긴 코스는 당분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고생한 만큼의 멋진 정상의 풍경은 값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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