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다는 말이 일상의 언어가 아닌지가 오래다.
주말마다 오던 비가 이제야 물러났는지 오늘 아침은 습도도 없고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다. 아침에 잠시 산책을 다녀왔는데 깨어난 모든 초목들이며 아파트 숲까지도 윤기가 흐르고 맑고 눈부신 하루가 시작되는데 마치 하늘에서 빛의 빙뱅이라도 일어난 것 같다. 이런 날은 산이 먼저 생각난다. 내가 어느 산속에서 푸른 물을 들이며 깊이 잠겨 있는 듯하다.
변산 마실길과 상사화라는 테마에 이끌리는 심상은 벌써 노랗게 꽃으로 들어찼다. 삼복더위를 피해서 오랜만에 떠나는데 이번엔 산행이 아니라 바닷길과 꽃길이 연상되어서 조금 들뜬 마음이 된다. 약 4시간을 달려가서 서해안 변산 송포항에 도착했다. 송포항에서 시작된 마실길 2코스에 접어들자마자 하얀 모래밭에 해당화가 붉게 피어 있어 지나칠 수가 없었는데 해당화 열매를 처음으로 봤다. 마치 작은 석류알같이 생겼다. 꽃이 진다 해도 꽃자리를 채울 만큼 열매가 과일처럼 이쁘게 달려 있어 해변의 볼거리가 되어 었고 몇 안 되는 꽃 무더기에서 마음으론 명사십리의 해당화를 보고 있었다. 고운 모래 해변 십리길에 해당화가 피어 있었다면 그 아름다움이 어떠할지 찾아가 볼 수도 없는 곳의 그 바닷가, 갈라진 강원도 원산의 고운 모래밭 명사십리 해당화를 연상하면서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이산가족의 그 마음의 애달픔을 알 것 같았다.
송포항 돌아서 해안절벽으로 오르는 들머리부터 상사화가 피어 있다. 꽃무릇이나 분홍 상사화는 봤지만 노란색이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해안길 양편으로 꽃이 노랗게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처음이라는 어감만큼이나 신비로운 만남이었다. 붉노랑이란 생소한 명칭을 붙였는데 음지에서는 꽃색이 진노랑이고 빛을 많이 밭는 양지에서는 꽃잎이 약간 불그레할 정도였다. 섞인 색보다는 진노랑이 더 예뻤다. 언제나 그렇듯 군락이라고 하면 계속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더 가면 더 좋은 것이 있겠지 하는 욕심이 들어서 자칫 여려 사람이 모여 걷다 보면 좋은 장면을 놓칠 수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난 처음부터 보이는 데로 꽃을 찍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아직 피지 않은 것이 많기도 하지만 초입보다는 드물게 이어지다가 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상사화`이름만으로도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했을까가 생각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상사화는 사찰 주변에 많이 피는 걸로 알고 있다. 내가 다니는 절에도 지금쯤 분홍색 상사화가 경내를 이쁘게 물들이고 비구니인 우리 스님의 마음을 빼앗고 있을 것 같다. 비구와 비구니의 하나쯤 간직되어 있을 법한 사모의 마음이 꽃으로 피어서 그리움만큼이나 꽃대를 키운 상사화를 보면 왠지 애련한 마음이 든다. 일반인들이야 그리움이 일면 만날 수야 있지만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스님들은 그럴 수 없음이 이 상사화를 심어 위로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꽃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두 개의 그리움이 돋아나는 이 꽃의 랑데부는 언제나 이루어질까.
이어지는 해안 절벽길은 꽃은 없고 아마도 해안경비를 위해 만든 길인지 초소도 많고 좁다란 길이 철조망을 끼고 이어진다. 절벽을 내려서면 고사포해수욕장을 향해가는 길이 물 빠진 바닷가 넓은 갯벌은 바닷물이 그려놓고 간 샌드아트가 되어 있고 작은 조약돌을 밟으며 걷는 해안길이 맑고 깨끗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고운 모래밭엔 온전히 갈매기들 차지가 되어 한가롭게 되찾은 영역에서 날 줄 모르고 쉬는 모습도 이쁘고 깨끗한 모래밭에 발자국 남기는 것도 마냥 즐거웠다.
잠시 해안가를 지나면 다시 절벽길이 이어고 하는데 해안길 그늘진 숲길이 끝나면 햇살이 너무 뜨거웠다. 처서도 지났으니 걸을만하겠지 싶었던 늦여름 빛이 얼마나 강한지 마실길 3코스를 이어가는데 두 달간 흘리지 않던 땀을 하루에 다 쏟아낸 것만큼 온몸으로 땀을 받아냈더니 지치기도 하고 마침 우리를 내려주었던 차가 우리 옆으로 지나간다기에 완주를 포기하고 차에 올랐더니 어찌나 편하던지, 목표지점을 중도에 포기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오곡을 여물게 해야 하는 의무감이라도 있는듯한 빛살이 내 몸 깊은 곳까지 살균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길을 완주하는 것이 아니라 꽃을 보기 위함이었으니 그 끝에 무엇이 있다한들 미련 없이 편한 길을 택했다. 비록 생각에 못 미치는 꽃무리였지만 처음 보는 노란 상사화를 만날 수 있어 참 좋은 여행이었다.
해당화 열매
계요등 꽃
숨비기 나무 꽃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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