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땅 속에서 시작하고 가을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다.
아침이면 늦여름의 여운에 초가을의 맑은 바람결이 더해지니 보석 같은 이슬이 맺히고 매미소리 느려지니 풀벌레 소리 요란한 가을 맛이 향긋한 자두 한 알을 깨물었을 때의 그 맛이다. 무더위에 지치고 고된 여름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뒤따라 가을이 온다는 무위자연의 순리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긴 빨랫줄에 높은 장대 곧추세우고 깃발 같은 빨래가 펄럭이며 고추잠자리 그네 타는 가을 풍경이 스쳐가는 청량한 늦여름은 밤이 참 좋다. 그래서 우리는 달빛기행을 즐기러 간다.
한양도성길 2코스는 달빛기행을 할 수 있는 멋진 코스다.
한성대역에서 저녁 7시에 만났는데도 도심에는 한낮의 열기가 그대로다. 오른편에 높은 축대 위로 혜화문이 보이고 조금 걸으니 바로 성곽으로 접어드는 길이 나온다. 성곽에 오르니 멀리에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한양의 진산인 북한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도심에서 가장 높게 보이는 보현봉이 우뚝한 가운데 오른쪽 끝으로는 인수봉이 보인다. 아직은 석양의 빛이 남아 있어 원경을 담을 수 있어 바쁘게 사진을 찍는다. 원경을 먼저 살피고 성곽을 걷는데 높다란 한양도성 성곽이 마치 무명천으로 기워입은 가난한 양반의 두루마기처럼 옛것에다가 군데군데 끼워 넣은 하얀 돌들이 세월을 기운 것처럼 함께 공존하는 고풍스러움이 멋스럽다.
어느덧 석양도 지고 황혼빛이 붉게 물든 서쪽하늘 아래에는 하나 둘 도심에 불이 켜지고 시간은 하루를 거둬서 어둠 속에 묻어버린다. 그러나 어둠에 묻힌 도심의 변신은 수수하던 차림에 화려한 반짝이를 입고 우리를 위해 무대에 선 것 같다. 그 무대 속에는 아스라이 남산타워가 불춤을 추고 서울의 밤은 무희들의 현란한 댄스 같은 네온의 밤이 펼쳐진다. 발밑에는 성곽을 밝히는 조족등의 조명이 들어오니 긴 성곽의 둘레는 잠자던 한양의 용들이 일제히 깨어난 듯 꿈틀거린다. 가까운 곳에 이렇듯 걷기 좋은 곳을 제쳐두고 그동안 어디를 헤매고 다녔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길을 걷는 밤이 너무 좋다. 차오르는 상현달이라면 어느새 빛을 발할 텐데 음력 스므하루 하현달을 보기엔 밤이 깊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도심의 불빛만으로도 편히 걸을 수 있는 성곽길의 낭만이 함께 걷는 모두를 네온 따라 흔들리는 청춘이게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머지 길을 다 걷고 싶다는 생각이 이미 나와의 약속이 되어버린 금빛 쏟아지는 가을날 오후를 연상하며 걷다 보니 낙산공원에 이르고 우리는 예정대로 쉼터에서 "제주올레"라는 주제로 4 행시 백일장을 여는 동안 모기떼들이 양식이라도 저장하려는지 마구 침을 꽂아댄다. 그렇게 모기를 쫓으려고 온 몸을 움직이는 동작이 탈춤같이, 막춤같이 장원을 뽑는 순간에 우리는 모기한테 몸 보시를 하면서도 작은 가슴 떨림으로 너무 즐거웠다. 발표를 하는데 어느 한 사람을 뽑을 수 없을 정도로 다들 공감 가는 내용으로 잘 지어서 추첨을 통해 명랑 아이콘인 미영 씨가 당첨이 되었고 모두 축하를 하면서 모기 춤사위를 끝내고 도심으로 내려가는데 조명을 받은 성곽과 이어진 둘레가 너무 아름다웠다.
뒤풀이는 처음으로 알게 된 종로 5가에 있는 광장시장 야시장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 재미도 좋고 장원이 된 미영 씨가 쏜 육회를 곁들인 푸짐한 상차림이 오늘의 달빛기행을 빛내주는 에필로그로 막을 내렸다. 모두가 행복한 밤 한 때를 거닐었던 완클의 추억을 야경만큼 이쁘게 남기게 되어 주선해 주시고 함께 했던 여러 회원님 먼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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