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가지산의 초겨울

반야화 2019. 11. 22. 17:53

영남알프스의 중심 가지산

가을의 양면성에는 화려함과 멜랑콜리한 두 가지의 감정이 교차한다. 처음 가을이 시작될 때는 여러 계획을 세우고 정신없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쫓아다니다가 가장 아래쪽에서 화려함이 끝나면 이면의 늦가을엔 멜랑꼴리함의 주체할 수 없는 공허함에 젖어드는 계절병이 생긴다. 올 가을은 그 마음으로 울산까지 가서 가을을 배웅하고 왔다.

 

도전하고 싶은 것 중의 한가지로 남겨져 있는 것이 영남알프스 종주다. 너무 방대해서 시작도 못하고, 가장 높으고 중심적인 가지산을 중심으로 천 미터가 넘는 산군들이 아홉 개나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그중에 끊어서 4개를 갔다. 앞으로 나머지도 연달아서는 불가능할 것 같아 기회 되면 끊어서라도 다 가보고 싶은 영남알프스다.

 

길이 멀어서 새벽같이 출발을 해도 산행시작점인 석남터널 휴게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12시가 다됐다. 약 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코스를 석남터널 앞에서 시작하는데 가파른 데크계단을 거의 정상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어 처음부터 치고 올라가는 데 너무 힘들었는데 중봉을 거쳐 정상 아래서 점심을 먹고 포만감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정상이 멀게만 느껴졌다. 힘들게 정상에 섰을 때의 조망은 겹겹이 겹쳐진 산줄기와 길게 뻗어 내린 산 주름의 멋이 얼마나 좋던지 오랜만에 가려진 게 아무것도 없는 시야가 너무 좋았다. 세상의 산들이 다 한 곳에 모인 것만큼이나 중첩된 산들 속에서 조약돌 하나 굴러다니는 것 같은 내가 얼마나 작은 지를 산들은 보았을 것이다. 정상 인증을 한 뒤 쌀바위를 찾아갈 때는 평탄한 능선길을 걷다가 임도 삼거리에서 올라간 만큼의 높이를 하산하는데 경사가 심해서 힘들었다. 낙엽 아래 숨어 있는 잔돌을 밟기라도 하면 데굴데굴 굴러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까 해 질 녘이 다 돼서 석남사에 도착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경내로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일주문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그곳에는 아직도 가을의 색채들이 남아 있어서 마지막 단풍을 보고 "잘 가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되돌아왔다.

 

그동안 산행보다는 트래킹을 했기 때문에 천 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는 건 너무 오래되어서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체력을 테스트하고 싶기도 해서 가지산으로 갔는데 결론은 아직은 중간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세월의 풍화작용은 자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인체에도 풍화작용은 뼛속 깊이까지 찬바람이 일게 한다. 세월은 그렇게 필요 없는 나이는 쌓여서 시간의 무덤을 만들기도 하고 보존되어야 할 자연은 깎이게도 한다. 자연은 쌓이는 것도 탓하지 않고 깎이는 것도 세월 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배워야 힐 것들이 너무 많아 때때로 자연은 인간의 삶에 스승이 되어주기도 한다.

 

깊은 산중에는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사방이 깜깜한 적막강산이 되어버린다. 도시의 낭비적인 불빛에 비하면 그 적막함이 때로는 푹 잠겨 있고 싶은 고요이기도 하다. 만추도 넘어서는 초겨울의 따사로운 빛과 티 없이 맑은 하늘이 너무 좋았던 선물 같은 하루를 만끽한 날이다.

 

차창으로 찍은 울산 가는 길목의 늦가을 풍경

 

 

 

 

 

 

 

 

 

가지산 중봉에서....

 

 

태양의 심장을 꿰어버린 가지산 여신, 중심을 통과한 스틱의 끝이 보여서 더욱 태양을 관통한 것처럼 보인다. 내일 태양이 떠 오리지 않으면 어쩌냐고 하던 카메라맨의 위트가 딱 어울리는데 그래도 내일의 태양은 분명히 뜬다.

 

 

 

 

 

 

 

 

마지막 잎새조차 없는 하얀 산이 되었다. 같은 수종뿐인 가지산 정상의 모습은 불필요한 걸 다 벗어버린 왠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한 온전한 겨울산이다. 멀리서 보일 때는 마치 서리가 하얗게 앉은 것 같은데 빛까지 좋아서 더욱 선명한 단조롭고, 화려하던 가을 옷을 다 벗어버리고 겨울과 맞설 준비가 다 된 듯하다.

 

 

 

 

 

 

 

 

 

 

정상에서 임도를 따라 하산하다가 석남사를 향해서 깎아지른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오면 해 질 녘의 고담 한 석남사 정경이 가지산 자락에 포근히 싸여 있다. 비구니승의 수도처인 석남사는 구도의 정신이 충만하면서도 들어내지 않는 그분들의 속내처럼 아름답고 자애로운 심성을 닮아 있다.

석남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

 

물의 힘으로 깎아낸 것이 노천 욕조 같은 반듯한 모습이 된 게 신비롭다.

 

 

 

 

 

 

석남사 일주문

하산 후 주차장에서 바라본 가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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