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과도 같던 지루하고도 버겁던 여름이 드디어 끝자락까지 거두어들이는 것인가. 촉촉하게 젖은 땅에서 가을향기가 올라오고 나뭇잎은 무더위를 견뎌낸 흔적들이 애처러울만큼 말짱한 게 없다.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한데 붙잡고 싶은 사람이어야 향기를 남긴다. 그러나 여름의 뒷모습은 잘 가라는 말 외에 붙잡고 싶은 마음조차 없으니 향기 없는 계절이다.
가을은 안에 있으니 밖에 나가나 다 좋다. 집에만 있어도 쾌적함이 좋고 밖에 나가면 숲 속을 걷기에도 참 좋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말은 계절을 넘어서는 함의를 생각하면 그 속에는 인생행로가 들어 있어 기울어가는 내 생의 가을처럼 쓸쓸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고 한해살이가 이룬 거 없이 시간만 거두어들이는구나 싶은 생각에 더욱 쓸쓸함이 파고든다.
어느새 다 커버린 모과 한 알을 주웠다. 이제 노랗게 빛날날만 남았는데 모과의 생에 금이 쩍 간 채로 경쟁에서 밀려난 낙과의 모습조차 살아남기 비정함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나무에서 벌레를 물리치고 노랗게 빛날 승리의 모과는 얼마나 될까.
여름 두 달 동안 트레킹을 쉬었다. 트레킹메이트들이 저마다의 여행을 끝내고 시작하는 날의 트레킹 장소는 아주 높은 곳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리는 가을처럼 우리도 높은 시작점에서 가을하늘처럼 내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 예보가 있어 땅에서 올라가는 봄처럼 이면 어떠냐고 비 맞으면서 걷기 좋은 최적의 장소인 서울대공원 동물원 둘레길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대공원에는 이미 벚나무 가로수에 가을을 걸쳐놓았고 우리는 그 길에서 서로에게서 우리생의 가을을 마주 보며 행복해했었다.
어느 한 가지에 심취하기 딱 어울리는 계절이 가을이다. 더구나 가을을 많이 타는 나는 어쩌면 가을이 두려워 잘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쓸쓸한 계절에 심취하기보다는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할 때가 쓸쓸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함께 길을 걸으며 정담을 나누는 것에 집중해 있을 때가 행복을 느끼게 해 준다.
아름다운 뒷모습에는 나이도 없다.
자엽 안개나무의 우듬지는 안개가 맺힌듯하다.
물봉숭아는 아직도 여름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누린내풀꽃, 이름과 향기를 무색게 하는 풀꽃이 어쩌면 이렇게 이쁜지, 겉모습에 현혹되어 깜짝 놀랄 벌나비가 생각난다. 이쁘다고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는 꽃이다. 사진을 잘 찍게도 하지 않는 풀꽃인데 비에 젖어 흔들리지 못해 얻은 이쁜 모습이 무척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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