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겨울에 지리산 종주를 했다. 산행코스 : 성삼재~노고단~반야봉~중봉~묘향대~삼도봉~벽소령~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중산리, 그때 눈은 스틱을 꽂으면 손잡이만 나오는 높이로 쌓여 있고 길은 한 사람 지날 만큼 겨우 외줄기, 총길이 40킬로미터 산행시간 20시간 새벽 4시에 성삼재에 도착해서 어둠 속에 길을 가는데 춥고 힘들었지만 두 번의 일츨도 보면서 결론은"행복은 공짜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죠.
외줄기 눈길 지리지리 멀기도 하더라
신새벽 어둠부터 중천에 뜬 해 길기도 하더라
차라리 날 저물어 지리산 어느 품에 나 깃들고 싶더라.
추운 밤을 세석대피소에서 지새우고 새벽에 촛대봉에서 일출을 봤을 때 서서히 차오르는 여명에 드러나는 첫새벽의 푸른빛으로 깨어나는 지리산의 장단고저 어울림의 곡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굴곡진 삶이 힘겨운 사람이 있다면 지리산에 가보시라! 굴곡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안다면 생의 굴곡도 참고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끝없이 걸었던 멀고 먼 길을 발끝이 알지만 한계가 보이지 않는 넓이는 작은 두 눈으로 받아들여 인식하는 느낌뿐이었다.
2016년 2월 다시 그 길을 가는 날이다. 이번 코스는 백무동-장터목대피소-천황봉-법계사-중산리다. 지리산 근처에 다 달았을 즘 차창으로 보이던 하얗게 덮인 산꼭대기 눈을 보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산에 오르는데 백무동 계곡은 역시 기대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내놓았다. 그늘진 계곡은 겨울왕국의 얼음궁전 같은 그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산객을 맞이했다. 상고대였다가 녹아내리는 순간을 겨울 여신의 손길로 잡 아메 어버린 얼음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따라 하늘과 얼음꽃과 그 모습을 대하는 내 마음까지 삼위일체로 크리스털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늘엔 숨은 구름도 한 점 없고 얼음꽃은 어쩌다 스치기라도 하면 쨍그랑 쨍그랑 소리를 내는 고급 와인잔의 부딪힘 같고 내 마음에도 투명한 맑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그런 절정의 순간을 맞보면서 약 한 시간 정도 오르니까 참샘이 나왔다. 언 땅 밑을 뚫고 나오는 가느다란 줄기의 샘물을 한 잔 마시고 그 찬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드는 순간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만발한 얼음꽃이 간직되었던 골짜기 위에는 해가 들고 점차 나무들은 얼음꽃보다 따뜻한 해가 더 좋다는 듯 다시 나목으로 모든 촉수들을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따사로운 빛을 빨아드리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다음, 때가 되면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질서이며 아름다운 섭리다. 자연의 교훈만 잘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도 평화로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환상적인 풍경에서 들뜬 마음을 잠재우고 묵묵히 걸어 장터목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에 천황봉으로 출발해서 3시에 천황봉 정상에 도착했다. 천황봉에 오른다는 것은 어느 산이나 그렇듯이 마치 인간세를 벗어나 천상계로 오르는 여정 같다. 그러니 힘들지 않고 승천을 어떻게 맛보랴만 무척 힘들었다.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지상 선계의 중심이 되는 삼신산 중의 하나다. 신이 상주하는 영역에 인간은 잠시 다녀갈 뿐 머무를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 곳이다. 천상계에서 휘돌아 굽어보는 산경은 얼마나 장대하고 드넓은지 내가 사는 곳은 한 점에 불과해 보인다. 그런 내가 한 발 한 발의 이어짐이 결국에 천황봉에 올라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는 멋진 기행을 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 올라간 만큼 내려감도 똑같이 힘든 과정이 남아 있다. 날이 포근해서 눈이 녹으면서 습한 눈길이 미끄럽고 가파른 길을 내려오는데 무척 떨어야 했다. 이 험한 눈길을 어둡기 전에 다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열심히 행군을 했더니 예정대로 6시 조금 자나 주차장까지 도착할 수 있어서 준비해 간 플래시는 쓰지 않았다.
날씨는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고, 아마도 바람이 구름을 몰고 소풍이라도 갔나보다.더없이 좋은날에 더 없이 좋은 산행, 이 하루의 행복이 몇 날 간 여운으로 남기를 바라면서 편히 쉬어야겠다.
나는 새가 잡혔다.
통천문
천황봉
천황봉에서 보는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