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의 양면성을 다 알만큼 경험한 세월을 살았는데 가끔은 그 양면성 때문에 드러내 놓고 좋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눈이 그렇다. 어느 지역에는 눈 때문에 피해를 입고, 어떤 이들은 눈에 걷혀 낭패를 보는 와중에 나는 내심 눈을 그리고 있었으니 이기심인 줄 알지만 입춘이 다가오는 1월 하순의 산행인데도 마음껏 설경을 보지 못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산행은 예정된 코스를 바꾸어서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는 전라도 진안으로 갔다. 우리나라 지도에다가 백대 명산을 점찍으면서 그 완성도를 걸어두고 싶은데 마침 또 하나의 백대 명산을 가게 되어서 무척 좋다. 거기다가 눈까지, 이미 많이 적재되어 있을 것 같은 곳에 가는데 아침에 나서니 또 눈이 온다. 이것이 덕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르지만 오후에는 갠다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간다
산 아래 내처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올라가는데 싸락눈이 계속 내리고 있어서 어떻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었었다.뉴스로 들었을 때는 초입부터 적설량이 많을 줄 았았는데 남쪽이어서일까 크게 많이 쌓여있지도 않았고 날씨도 바람이 없어 약간 덥기도 했다. 초입에서는 빈 가지였는데 한참 오르다 보니 나뭇가지에 눈이 조금씩 달라붙어 하얗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아니어서 큰 걱정 없이 오르는데 높이를 더할수록 바람도 일고 눈보라에 시야가 흐려서 원경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만 보여서 답답한 가운데 눈은 계속되고 바람까지 있어 조금 걱정하면서 일행이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하면서 올랐다.
사방을 둘러봐도 점심 먹을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대충 동봉을 바라보는 아래인지 거기쯤에서 선채로 점심을 먹고 눈 위에 올려두었던 식어버린 물 한잔을 마지막 한 모금 들이키고 돌아섰는데 방향도 모르는 먼 하늘에서 한 줄기 서기 같은 게 비치더니 갑자기 사방이 확 드러나면서 구름이 물러나고 온 산에 설경이 다 드러났다. 그때의 그 밝음은 마치 어느 선승이 참선의 고행 끝에 맛보는 확철대오의 명료한 의식세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냐하면 미혹한 중생에서 마음의 때를 다 걷어내고 큰 깨달을을 증득하고 나면 육심 통이 터지고 걸릴 게 없으니 갑자기 모는 게 밝아져 벼리는 그 광명의 세계와 환희를 맛보는 그런 기분이 아마도 오늘 내가 본 풍경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입춘이 코앞인데 올들어 처음으로 맛보는 마음에 그리고 그리던 설경을 제대로 보고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희디흰 눈밭을 밟으면서 일행과 조금 떨어져서 걷는 동안 내 몸에 감각기관이 다 깨어나 인식장용이 일어나면서 아름다운 설경을 만끽하는 행복한 순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