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에 있는 응봉산으로 간다. 유명한 덕구온천 입구에서 출발하여 유턴 모양으로 돌아서 온천 원탕이 있는 곳으로 돌아 나오는 코스다.
이곳도 백대 명산에 속하는 만큼 입구에 들어서면 향기부터 다르다. 뽀송뽀송한 모래가 깔려 있고 일대 소나무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는 그 어느 폐포에도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처녀 공기가 춘설을 녹이면서 짜릿하게 뿜어내고 있었으며 그 맑은 공기에 흠뻑 젖은 몸은 바람도 없는 맑은 하늘로 풍선이 된 듯 나는 기분이 된다.
전날 울진 쪽에 많은 눈이 왔고 기온도 낮다는 걸 보고 마지막 눈 산행이 될 것 같아 나섰는데 아니나 다를까 강원도에 들어서니 차창으로 보이는 양 옆에는 온통 설국 같은 풍경이었다. 수종이 주로 소나무여서 촘촘한 솔잎들이 습기를 머금은 춘설을 이고 무겁게 늘어져 있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경과되고 기온이 오르니 마치 도화지 위에 그렸다 지운 것처럼 춘설은 맥없이 녹이 없어지고 빈 도화지만 남는 것 같았다. 대신에 날씨가 너무 맑고 좋으니까 설경을 포기해도 날씨 하나만으로도 산행하기엔 최적의 조건이 되어준다.
겨울산은 눈이 아니면 나무를 봐도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는 이름표를 다 떼 버리고 잠들어 있다. 그런데 울진의 산은 다르다. 나무마다 소나무라는 이름표를 자랑스럽게 달고 독야청청 푸르른 모습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특히 울진의 소나무는 금강송이 많아서 붉은 피부에 쭉쭉 뻗은 멋진 몸매로 어느 궁궐의 기둥으로 거듭 태어나는 재목으로 모셔져 갈 때를 기다리는 곧은 절개를 지키는듯하다. 금강송은 다른 소나무 수종보다 더 느리게 자란다고 하는데 아름드리로 서 있는 걸 보면 그들은 다 신목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그 소나무에 톱을 갖다 데는 사람은 용서를 빌고 제를 올리며 죽되 죽지 않는 다른 이름으로 운명을 바꾸어 드릴 것을 약속하고 처음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고도를 높여가면 바닥에는 푹푹 빠지는 눈길이 있고 먼산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 있어서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설경을 더 멋진 모습으로 보기 위한 걸음이 바빠진다. 그렇게 정상에 올랐더니 응봉산 정상에서 보는 파노라마의 산맥이 얼마나 멋스러운 장대함을 보여주는지 어떤 화려함의 색상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얀 눈 바탕에 소나무의 푸른 경계로 골골이 흘러내린 섬세하고도 검푸른 산 주름이 어느 대가의 실경산수화를 보는듯하다. 그런 풍경 속 한 귀퉁이에 "점심 먹는 사람들" 한 장면을 살짝 그려넣었다.언제나 산행에서는 점심먹는 자리를 잘 잡으면 그날의 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충만함이 된다. 정상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마련한 자리에서 점심을 먹고 곧바로 하산하는데 길이 섬뜩할 정도로 가팔랐다. 몇 년 전 응봉산 다른 길로 덕풍계곡을 가다가 몇 바뀌 굴렀던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너무 무서웠다.
험한 하산길을 무사히 내려와서 보니 여름이면 깊은 골짜기에 물리 차고 녹음이 짙어지면 아주 좋을 것 같은 계곡에 덕구온천의 원탕이 있다. 원탕과 욕탕의 거리가 얼마나 길에 이어져 있는지 놀라웠다. 굵다랗고 끝없이 길게 물길이 이어져 있는 시작점에 온천수로 만든 족탕이 있어서 따뜻한 노천 용수에 발을 담그니 따순 기운이 온몸으로 역류하는 기분 좋은 마무리가 되어주었다. 하루를 금강송의 기운으로 가득 채우고 돌아오는 날이어서 얼마간은 상쾌하게 그 기운으로 살 것 같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