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바다의 심연은 향수병과도 같았다.
길을 가다가도 숲을 보면 갑자기 그 속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실록의 계절이다. 까만 나무들이 봄을 품고 있을 때부터 봄을 해산해서 꽃천지를 만들고 이제는 꽃 진 자리가 초록바다가 될 때까지 경기도를 걷는 중이다.
아직도 처음 가는 경기도의 야산은 산재해 있다. 어제는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모락산에 올랐다. 우리는 여행이라는 준거집단에서 언제나 길을 선택함에 의견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중에 경기도의 길들을 훤히 꿰고 있는 리더가 있어서 그가 길을 정하면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인연이다.
사월의 꽃은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고, 오월의 꽃은 순박하지만 향기가 있다. 그렇듯 겉치레가 화려한 진달래, 철쭉에는 향기가 없으니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오월의 흰 꽃은 눈으로 보고 향기로 온 몸이 젖어 드니 화려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겉치레가 화려한 사람은 알고 보면 실속이 없고 순박하지만 속이 꽉 찬 사람들이 있다. 겉보다는 속이 꽉 찬 사람의 향기에 끌리기 마련이다.
산속은 온통 하얀 꽃들이 피어서 마치 뚜껑을 잃어버린 향수병과도 같고, 향수병 속에 정신이 빠져 허우적거린 발길과도 같았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향기를 지닌 아카시아, 찔래, 떼죽, 국수나무, 쪽동백 꽃들이 일제히 피어서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바람을 타지 않은 향기가 몸속 폐부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짓 푸르고 향기로운 숲 속을 헤매다가 정상에 오르니 모락산은 의왕시를 조망하는 전망대처럼 뾰족하게 솟아서 한나절만 할애하면 내가 사는 곳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어 마을조차 좋아 보였다. 정상을 찍고 돌아서 하산할 때는 마치 목표를 달성한 뒤 일에 지쳐 모든 걸 놓아버리는 마음 같이 지친 걸음이 속도를 잃고 흔들렸지만 여유롭고도 편안한 모락산 둘레길 숲 속에서 빠져나와야 되는 허허로움도 있었다.
이렇듯 한 시절의 풍미를 놓치지 않으려 부단히 쫓아다닌 봄에 어느새 여름의 열기가 침두 하는데 오월의 뒷모습을 봐야 하는 아쉬움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잡을 수 없어 괴로운 심사여!!
그러나 여름은 여름의 맛을 즐길 수 있으리라. 우리가 계절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절이 있으니.
모락산정상 385미터 국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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