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던 시간 속에 절망의 꽃처럼 첫눈이 내렸다. 한나절 남한산성을 헤매다 돌아왔더니 마을에는 이미 눈이 다 녹아서 마치 한나절이 꿈결인가 싶었다.
도심에선 눈이 내려도 잘 쌓이지 않는다. 더구나 굳게 다져지지 않은 결정체 그대로 보일만큼 여린 첫눈이기에 예보를 믿고 잡았던 약속을 앞 당여 눈 오는 날 멀리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귀한 눈인데 눈앞을 가리면 어떻고 보이는 게 없으면 어떠리, 그저 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은 첫눈인데, 같은 마음을 가진 산행 친구 셋이 한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예상대로 눈이 내리는 중이어서 자욱한 안갯속 같고 눈발이 날려서 눈길만 보였다. 바람도 없고 포근해서 고이고이 성벽과 나뭇가지에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남한산성에 여러 번 갔지만 눈이 온 후에는 성체 옥개석에만 하얗게 남아 있을 뿐 오늘처럼 성벽까지 하얗게 쌀가루를 채로 내린 것 같은 그림은 볼 수가 없었다. 너무 아름다운 성체를 하얗게 바라볼 수도 있고 그 아래서 눈길을 걷는 행복감이 너무 좋아서 오늘 하루의 행적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걸었다.
첫눈을 맞으며 부여한 의미는 여럿일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첫눈, 瑞雪,2020 겨울 첫 산행, 2020 송년산행,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조용히 걷다가 성 아래 옹성치가 있는 넓은 공터에서는 여러 마음을 뭉쳐서 눈밭을 어린아이처럼 함부로 뛰어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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