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가을 그림책

반야화 2020. 10. 24. 16:26

가을 그림책 첫 페이지에 채색을 한다.
마음속으로 드로잉만 해 두었던 가을 그림책을 열고 먼저 초록이 퇴색된 옅은 그린색으로 색을 입히고 갈색으로 덧칠도 하면서 채색을 하다 보니 올 가을은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으로 완성될 것 같은 예감이다. 설악에서 물들지 않으면 화려한 만산홍엽으로 채색되지 않을 것 같다. 설악에서 시작된 붉은 물결이 아직 내 주변까지 도착하지 않았지만 난 이미 설악에서 물들었던 지난날들의 화려함이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으니 살며시 꺼내보기만 해도 충만하다.

나직한 산은 경기도를 둘러싸고, 경기도는 거대한 성벽처럼 서울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서울 속에서 우뚝한 북한산 국립공원을 떠받치고 있는 도시 형태다. 이런 자연환경을 포스트 코로나로 생긴 나의 변화된 낮아진 마음이 기록되는 시간들로 채워지다 보면 그것으로 굳어져 더 높은 곳을 지향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염려되기도 한다. 마음은 아직 높은 곳을 향해 있는데 세상의 조건이 허락되지 않으니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어디서든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에 있으면 된다.

산은 낮은데 이름만은 설악에서나 볼 수 있는 마등령 같은 명칭을 붙여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처음 가는 산은 어떤 곳일까 하는 마음으로 경기도 오산에서 출발한다. 높은 지대에 우뚝 솟아 있는 아파트 마을을 지나 올라가는 초입에서부터 경사도가 가파르다. 외줄기 곧은길은 양쪽에 쭉쭉 뻗은 소나무길인데 더 깊이 들어가도 온통 소나무 길이어서 사계절 언제나 푸르름을 잃지 않는 청청한 야산이다. 요즘은 등산용 스틱을 녹이 쓸 정도로 사용할 일이 없다. 야산만 다니다 보니 아예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날 스택을 분해해봤다. 말짱했다.

등산로 입구

낚시터 같은 저수지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정도를 벗어났다. 정도로만 다니면 아무나,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지만 비도로 가면 나만 보는 풍경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외로 생각지 못했던 호젓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날도 우리는 아무나 가 아닌 우리들만 보는 풍경에서 옛날까지 소환해놓고 논둑에서 새참을 먹던 모습까지 재현하면서 시작하는 가을의 낭만을 고스란히 즐겼다. 다락논 같은 층층의 논둑길을 산 아래까지 한참 들어가는 도중에 가을걷이가 끝난 빈 논에서 밀레의 "이삭 줍기"작품까지 만들어 내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농로에서 지나온 추억의 시절에 젖어보는 것도 너무 좋았다. 정도로만 갔으면 맛볼 수 없었던 행복한 순간이 너무 좋았다.

뜻대로 연출되지 않은 어쭙잖은 이삭 줍기

논둑에서 먹는 점심

힘없는 나무가 부러지기 직전에......

나도 물들었다. 가을의 섬세한 손길은 작은 풀포기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 어루만져 물들려 준다.

철없는 진달래, 잎은 갈 때를 알고 윤기를 잃었는데 어쩌려고 꽃은 피어나는지...

정상에서 바라보는 화성시 동탄 쪽

내려오는 길이 막혀 우회하다 보니 코스모스 꽃길로 하산했다.

본인 찾기,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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