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가족등반, 설악산 대청봉

반야화 2021. 5. 31. 13:55

오월의 마지막 날,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
코스: 설악동 소공원-비선대 -천불동 계곡 -희운각 소, 중, 대청봉 -한계령으로 하산.

전 날 연 3일 비가 왔고 산행 이튿날도 비가 왔는데 용 하나게도 전 후 사이 선물 같은 하루,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작년 겨울에 온 산이 하얗게 덮인 설경 위로 일출과 운해를 환상적으로 봤는데 이번엔 산 골짜기 주름진 곳까지 선명할 정도로 날씨가 맑아서 깊은 계곡까지 흘러내린 산 주름 발치까지 먼지, 바람, 운해 없는 3 무의 설악산을 봤다.

설악산을 오르려 할 때는 늘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면서 모험심으로 도전을 결심하게 된다. 설악산을 한 번도 올라보지 않은 초보 딸 부부와 코스마다 다 올라본 엄마, 그러나 체력적인 면에서 분명 달라서 우리는 서로를 걱정하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2년여 만에 수도권을 벗어나서 시외버스를 처음 타보는 것 같다. 쉬지 않고 걸었지만 수도권을 벗어나지 않았다. 5월 30일 동서울 터미널에서 저녁 7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속초로 가는데 어둠이 서서히 밝음 속에 섞여 들어 흐릿해지는 창밖 풍경을 스치면서 달려가는데 장마 같은 비가 내린 후 산들은 운무를 산 위로 뿜어 올리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는 재미를 오랜만에 느껴본다.

이번에 작은 딸 내외와 설악산을 함께 오르게 된 것은 그동안 내가 보고 느꼈던 설악의 장쾌하고 힘찬 모습을 딸이 느끼게 하고 싶었고 공감하고 싶었다. 큰딸은 공감하고 싶어 주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작은딸은 자연을 대하는 공감대가 나와 비슷한데, 또한 성향이 비슷한 짝을 만나서 너무 좋다. 딸이 상대를 선택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이 둘의 성향이 같아서 인생행로를 영원한 친구처럼 살아가는 걸 로망으로 생각하더니 딱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참 보기가 좋다.

깊은 숲 초록 속으로 들어가는데 봄비가 자주 내려 계곡은 물을 가득 채우고 음률을 만들면서 힘차게 흐르고 여러 개의 폭포는 동그란 옥담을 만들어 두었는데 등산로에는 함박꽃이 하얀 목화송이를 달고 있는 듯하고 쪽동백은 꽃송이를 곱게 떨어뜨려 밤새 하얀 별이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으로 길을 장식해 두었다. 처음으로 설악산을 오르는 딸이 차도를 지나면서 보는 풍경도 좋았겠지만 설악의 속살을 보는 재미가 얼마나 좋았을지 짐작이 간다. 오월의 푸르름이 젖어드는 길을 딸과 함께 오르니 긴 길이 지루하지도 않고 서로를 걱정하던 염려에서 자연스럽게 놓여나면서 행복한 산길을 올랐다.

높이 솟은 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하나의 아름다운 구형으로만 보이지만 지구에 붙어사는 인간 세상은 천태만상이듯이 산 역시 아래에서 쳐다보면 뾰족하게 솟은 거대한 형체로만 보이지만 산속으로 들어가면 인생행로 같은 길이 펼쳐져 있다. 높고 낮음, 힘들고 장애 많은 험로, 그 길 끝에는 목표를 이루는 성취감,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안주할 수 없어 내려와야 하는 등등의 천태만상의 고난과 행복이 얽히고설킨 삶을 끌어안고 하나의 거대한 우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14년 전에 설악산 공룡능선을 오르면서 이것이 내 산행의 마침표가 될지 쉼표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랬던 내가 그 후로도 공룡능선을 두 번 더 올랐고 대청봉과 한라산을 계절마다 수도 없이 올랐다. 그뿐 아니라 알프스 몽블랑 트레킹, 로키산맥 트레킹, 제주 울레 두 번 완주를 했고 지금도 길을 걷는 걸 이어가고 있으니 몸은 나이로 평가할 게 아니라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알프스 이탈리아 구간인 돌로미테를 트레킹 하는 것이다. 이미 계획이 다 서 있는데 코로나가 길을 막고 있다.

시간이 쌓여갈수록 자연이 자꾸 좋아지는 이유는 아마도 낙엽귀근 같은 본능이 아닐까, 자연과 친해져서 언젠가는 그 속으로 돌아갈 때 두려움이나 거부감을 없애려는 본능 같은 거. 본능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모양이다.

등산을 하기 전에 내 몸에 며칠간 대접을 잘했더니 역시 그 보답을 해주었는지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어서 딸과의 행복한 추억 하나를 추가했다.

소공원길

장군봉


중청
중청과 대청봉

가리봉

가장 긴 코스를 13시간을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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