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용인 보정동 고분군

반야화 2021. 8. 26. 14:40

우연히 알게 된 일이다. 혼자 산책을 하면서 길을 따라가다 보니 보정동 고분군이란 이정표가 나와서 계속 길을 따라갔는데 아무리 가도 현장까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도 끝을 보지 못한 찝찝한 마음이 가셔지지 않아서 결국 다시 찾게 되었다. 처음 가던 길이 아니라 다른 경로를 찾아서 갔다. 길 찾기를 해서 가는 경로는 구성역에서 20분가량 걸으면 되는 길인데 평소에 경부고속도를 가로질러 가는 일이 거의 없어서 초행길인데 그쪽에는 고속도로 아래로 작은 찻길들이 질서 없이 엉켜 있고 인도는 풀만 자라 있는 걸 보니 사람의 통행은 거의 없어 보였다. 물론 다른 길도 있겠지만 구성역을 기점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현장에 가서 보니 장소는 보정동 서쪽 야산 기슭이었고 아래는 삼마곡지라는 낚시터가 있었다. 도로에서 보이는 고분을 먼저 둘러보고 우리는 잠시 고분이 있는 전망대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쉬면서 천년 전의 역사와 마주하고 있었다. 천년 전에도 같은 바람이 불었을까, 맹물 외에 다른 음료라고는 없었을 당시를 생각하며 봉분마다 커피를 따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잔디 안으로는 함부로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바람은 죽지 않으니 어쩌면 그 당시의 바람이 살아서 지금의 나를 "어서 와"하면서 어루만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보정동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면서 긴긴 세월의 깊이 속에서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이제부터 다시 길을 찾아서 걸어야 되는데 이름 없는 야산 하나를 통과해서 소실봉 정상을 올랐다가 수지 쪽 만현마을로 내려왔다. 이름 없는 야산이라고 했지만 그 일대는 아직 발굴하지 못한 고분들이 있는, 전체가 고분의 품인 것 같았다. 발굴한 것만 80기 정도이고 전체 130 여기나 된다고 한다. 고분군이 있는 야산과 소실봉 사이에 학교가 있고 우리는 모르는 길을 찾으면서 가다 보니 방향만 짐작하고 만현마을로 내려왔는데 다행히 길을 잘 찾았던 것 같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면 유적지를 둘러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 나라의 고분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남의 나라 고분에 별 관심도, 의미도 두지 않고 일정에 따라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우리 동네에 있는 유적지를 보는 건 후예로서의 어떤 의무감 같은 마음이 동해서 꼭 봐야만 할 것 같아서 찾게 되었다. 용인 보정동 고분군은 6세기에서 9 시기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2002~2004년 일대 주택 신축과 신갈~수지 간 도로확장 공사를 위한 발굴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생거진천 사거용인"이란 말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고대부터 용인에는 명당이 많았던 모양이다.

고분군에는 한 시대만 있는 게 아니라 석기시대, 삼국시대 원년, 통일신라시대를 망라하는 여러 시대의 무덤과 움집터까지 발견된 걸로 보아 보정동은 신라시대 이래 계속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여럿 중에서 봉분의 규모가 경주 왕릉의 버금갈 정도로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다. 아마 귀족이나 계급에 따라 다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모양은 둥근 형태에서 꼬리가 약간 있어 보이는데 발견 당시의 모습은 아닐 것이고 사적지로 관리되면서 원형을 살렸을 것이다. 봉분이 큰 것 두 개는 무덤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가 있게 해 두었다. 발견된 출토 물들을 보면 온전하게 형태가 보존되어 있는 것도 있고 깨어진 것도 있지만 그런 출토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전체를 보통의 공동묘지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어 고분 발견은 개발로 인한 파괴가 아니라 놀라운 성과로 보였다.

천오백 년을 잠자던 산속 숲에서 깨어나신 신들의 영혼과 만나는 시간은 감개무량했다. 현지에서 보는 일대는 밑둥치가 큰 나무들이 옆가지도 자라지 못하게 깊이 베어진 흔적이 있고 네모난 잔디의 모판이 무성하게 잘 자랐지만 아직도 약간 반듯반듯한 표가 나는 걸 보면 그 사이가 다 메워져 하나가 되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 될 것이다. 다 걷고 나니 뭔가 보람찬 날을 보내게 된 것 같아서 흐뭇했다.

버섯의 크기가 얼머나 큰지 마치 보름달만하고 풀잎이 계수나무 처럼 올려져 있다.

봉분을 연 내부의 모습과 출토된 유물,내부의 형태에서 네모난 방과 봉분의 유실을 막는 기능으로 보이는 호석을 놓은 규모를 보면 내부의 지름이약 7미터 였다고 하니 거기에 맞쳐서 외부 봉분을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된 것 같았다.
왼쪽의 큰 것은 열린 상태며 오른쪽의 봉분은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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