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종묘와 창경궁

반야화 2021. 9. 16. 10:57

초가을 볕이 따가운 날 서울 나들이를 했다.
고궁에서는 왠지 산책이란 어휘가 맞지 않아 거닐다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여럿이 보다는 혼자 아니면 단둘이 아주 천천히 많은 걸 느껴보는 시간이었으면 해서 딸과 둘이서 주마간산이 아니라 꼼꼼하게 살피며 고궁을 거닐었다. 계절도 봄보다는 가을의 정취가 더 고궁과 어울리는 느낌이어서 단풍 들기 전, 시들어가는 초록들을 보면 조선의 쇠퇴기가 연상되고 왜색을 입지 않으려고 애썼던 어떤 비애 같은 것이 서려 있기 때문에 고궁은 찬란한 봄도, 화려한 가을도 아닌 이즘에 거닐어보는 게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로3가역에서 만난 세 모녀가 익선동에서 처음 먹어보는 프랑스 음식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큰 딸은 다시 회사로 들어가고 작을 딸과 둘이서 고궁을 거닐었다.. 익선동은 처음으로 갔다. 처음이란 것은 늘 몰랐다가 알게 된 것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서울의 4대 문 안에 대표적 거리인 종로가 있고 서울의 동서를 가르는 옛 거리 좌우에 아직도 남겨 놓은 한양의 거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익선동이다. 한옥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덕에 겨우 겉모습만 남아 있고 거리는 넓힐 수 없어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건축물은 좁은 대문을 열면 공간이 넓어져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불편함을 들어내고 현대식으로 개조가 되어서 특색 있는 점포들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어 현대의 삶에 지친 사람들이나 서울을 찾은 관광객들이 찾아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지붕은 섯가래를 그대로 살려 칠을 하고 노출시켜서 멋을 부리고 낮은 천장은 밑바닥을 파내어 높이를 조절하고 현대식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다.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한옥이지만 옛날에는 4대 문 안에 있는 것이라면 다 사대부의 고관들의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내부를 보면 홑집이 아니라 본체와 행랑체를 갖춘 측면 겹집이어서 공간을 튀울 수도 있고 새롭게 인테리어를 하니까 공간이 꽤 넓었다. 종로 3가에는 고궁과 종묘, 4대 문 안의 삶의 터전이 있는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유일한 곳이다.

익선동 개조된 내부 천장모습
종묘 밖에서 보이는 울타리 같은 고목들이 키를 똑 같이 키우면서 종묘의 신위들을 지키는 모습에 수목들도 다 신목이 되어 울창하다.
종묘 정전으로 들어가는 신도.약간 돋은 중앙의 길은 종묘제례 때 신주와 향,축을 들고 들어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왕이 다니는 어로,왼쪽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제궁,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
정전은 지금 공사중이다.정전 바로 앞 월대를 보고 싶었는데 멀리서만 보고 와서 아쉽다.
영녕전
종묘 영녕전,보물 제 821호인 영녕전은 1421년(세종3년)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이 부족해서 정전의 별묘를 건립하여 태조의 4대조를 함께 모신 이후로 정전에 계속 모시지 않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건축물은 정전과 같은 모습이고 규묘는 좀 작은 것 같았다.
창경궁 정문인 명정문,아래로는 창경궁 풍경이다.창덕궁은 몇 번이나 갔으나 창경궁은 이번에 처음으로 봤다,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동궐이라 하였고 후원도 함께 사용했다.그리고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공주,궁인들의 처소로도 사용되었다.창경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향으로 지었는대 동쪽에 있는 궁궐 동산인 함춘원과 낙산을바라볼 수 있게 지었기 때문이다.안타깝게도 창경궁은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 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종묘와 연결된 맥도 끊고 도로를 개설했는데 지금은 다시 이어지는 통로를 구름다리로 연결시키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창경궁 정전
정전으로 들어가는 옥천교
옥천교는 아직도 물이 흐르고 있다.
높은 월대와 측면 회랑이 아름답다.
월대에서 바라보는 현대의 모습과 고궁의 공존하는 모습의 대비를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창경궁에 있는 백송,원래 고향은 중국 베이징 부근이며 조선시대 사신으로 간 관리들이 귀국할 때 솔방울을 가져다 심은 것이 여기저기 퍼졌다고 한다.
통명전과 양화당,통명전은 보물 818호이며 다시 세운 일상생활 공간이다.대청마루와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도 썼기 때문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오른 쪽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며 인조임금이 남한산성 피란에서 돌아와 거처하던 곳.
영조 38년(1762년)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역사를 같이한 나무이며 사도세자의 비명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 줄기가 비틀리고 속이 완전히 빈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는 슬픈 나무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뒤엉켜 자라고 있는 모습에서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이 살얼음판 같은 궁궐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하나의 몸체가 갈라져 서로 마주보는 묘한 묘습이 되었다.
궁궐의 역사를 함께하는 것 같은 수양버드나무,이렇게 오래된 건 처음 봤다.

궁궐 안에 있는 수목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식재된 것이라고 하는데 오직 궁궐을 지을 당시의 역사를 지닌 것 같이 보이는 주목이 있는데 한 가지는 죽어 천년을 지닌 듯하고 또 한 가지는 아직 살아서 잎을 달고 있는 걸 보면 살아 천년을 보낼 것 같은, 그야말로 천생천사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성종의 태실
보물 제1119호,8각7층 석탑인데 기단부는 4각형 받침돌과 8면에 안상(眼象)을 새긴 2단 고임돌과 8면에 안상과 꽃을 새긴 연화대로 구성 되었다.꼭대기는 흰돌로 만든 보주 장식을 올리고 몸돌에 성화 6년이란 글씨를 근거로 1470년 조선 성종 1세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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