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오대산 선재길

반야화 2018. 10. 17. 13:40

. 우리의 뇌, 마음속에는 조건이 주어지면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알고리즘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어떤 심미적 대상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4 미에 취하고 만다. 4 미란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말한 "좋은 계절, 아름다운 경치, 이를 즐길 줄 아는 마음, 유쾌하게 노는 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선재길, 난 그 길 이름에서 느껴지는 게 있어서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길인데 해마다 다른 일정에 밀려서 3년을 벼르다가 드디어 원을 이루었다. 물론 처음 생각에는 그 길은 혼자서 조용히 사색하면서 걸어야 할 길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월정사에서 출발해서 상원사에 이르러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철야기도를 하고 이튿날 산 정상까지 등산하고 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뒤로 미루고 이번에는 나와 같이 그 길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함께 걷기로 하고 떠났다. 아침 7시 50분 동서울터미널에서 진부행 버스를 타고 진부에서 다시 상원사행 시내버스를 타고 상원사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걸었는데 올라가면서 걷는 것보다 더 빛나는 색을 볼 수 있었다. 단풍은 햇빛이 중요한데 안개가 짙어서 걱정했지만 점차로 안개도 걷히고 예상했던 적기의 단풍을 마음껏 즐겼다. 햇빛은 그 어떤 물감보다도 자연의 원색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빛이 없으면 단풍이 붉을 수는 있어도 빛날 수는 없다.

 

9킬로의 길은 물과 함께 유장하게 절륜한 가을색채를 반영하면서 흐른다. 길은 오솔길이고 끝나는 지점까지 물소리를 동반한다. 길의 반려자  같은 숲에는 너무도 곱게 한지에 물감이 번져나가듯 아래로 아래로 더 이쁘게 번져가고 있었는데 혼자였으면 어쩌면 그 절륜한 아름다움에 눈물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단풍인데 나는 왜 이 늙음을 빛내지 못하는가 하는 우울감이 들 수도 있었으리라. 토마스 만의 마의산이란 책을 보면 "인생의 황금나무는 초록빛이다"라고 했다. 푸르고 싱싱한 초록색을 황금색으로 표현한 대비를 우리는 잘 알고 있고 누구나 그런 색을 지나왔다. 한 생을 잘 살아낸 자들은 붉게 죽어가는 단풍을 초록보다 더 아름답게 느낄 줄 알아야 하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선재길, 왜 하필이면 그 명칭을 붙였을까, 선재동자를 알고 나면 이해가 간다. 월정사와 상원사라는 대찰 간을 이어놓은 것도 뜻깊고 너무 아름다운 길이란 점도 함의가 있는 듯하다. 선재동자가 구현한 구도의 정신은 대승불교의 꽃인 화엄경 입법계품 34품에 다 녹아 있고 동자가 만난 53명의 선지식인 속에는 거지와 창녀를 가릴 것 없이 다 스승으로 삼고 도를 구한다. 그 외 온갖 직업을 가진 세속인들을 다 만나는데 하찮은 사람에게도 다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 선재동자의 구도 정신은 연꽃처럼 그 어떤 달변가에도, 고통과 번뇌의 말에도 물들지 않고 중도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우리들에게도 영원히 가르침을 주고 있는 화엄경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극소의 세계 속에 극대의 세계가 내재되어 있다"라고 하는 화엄의 진리를 이 시대에 생각해보면 거대한 인드라망 같은 인터넷 속에 작은 "나"하나가 있지만 작은 내 손에는 거대한 인터넷 속으로 연결되는 원리가 있다. 그러니 크다, 작다란 것은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난 이 길을 걸으면서 그 소란함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선재동자가 법을 구하는 구도의 시작길이 아니라 선지식을 다 만나 뒤에 성취한 도를 안고 환희에 찬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마치 "하산해도 좋다"라는 무도의 스승의 말을 듣고 하산하는 청출어람의 제자처럼 선재동자 득도의 마음 같은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 길 위에서 얼마나 행복한 순간 속에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웃음을 크리스털 가루처럼 깨뜨려 놓았는지 주색잡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듯이 우리는 추(秋) 색에 물들어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길은 이쁜 오솔길이고 길섶은 온통 붉은 단풍이고 물소리까지 더하니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길에 좋은 길동무까지 함께 였으니 더 바랄 게 없는 소풍이었다.

 

제주올레라는 구심점이 있어서 각 지역의 원심력이 형성되어가는 그런 시간이 모든 회원님들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복한 한 때의 추억을 남긴다.

 

 

 

 

 

 

 

 

 

 

 

 

 

 

 

 

 

 

 

 

 

 

 

 

 

 

 

 

 

 

 

 

 

 

 

 

 

 

 

 

 

 

 

 

 

 

 

 

 

 

 

 

 

 

 

 

 

저녁으로 나온 산채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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