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천황사 입구-바람재-바람폭포-사자봉-통천문-천황봉-구름다리-천황사
설악산에서 가을맞이를 했는데 어느새 붉은 물결 따라 내려간 곳, 영암 월출산에서 가을을 전송하는 산행을 하고 활활 타던 내 마음에서도 고요하게 불길을 거두는 산행을 했다. 작년에는 선운산에서 가을을 잘 보내주었더니 북쪽에서 맞이하고 남쪽에서 전송하는 질서를 따르는 것 같다. 월출산에서 무엇을 봐야 할지 미리 정보를 대충 알고 갔지만 그건 나만의 희망이 되고 마는 주마간산 격의 산행은 어쩔 수 없는 또 하나의 숙제가 되고 만다.
월출산, 이름만 들어도 달빛 찬란한 천하일품의 월색과 오직 달과 산, 단 둘만이 랑데부를 즐기는 그 밤의 영상이 얼마나 아름다울지가 연상되는 산이다. 김시습 선생도 월출산에 올랐던지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라고 하셨다니, 그러나 사람은 달과 산만의 만남을 방해할 방법이 없을 것 같은 험한 산세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워낙 많은 문화재가 있어서 등산도 좋지만 넉넉히 시간을 잡아서 문화재 탐방을 해도 참 좋을 것 같은 산이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를 시작으로 국보인 도갑사 마애여래좌상, 도갑사 해탈문, 무위사 극락전이 있고 보물로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 탑비, 월남사지 모전석탑, 월남사지 석탑 등 지방문화제와 더불어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서 며칠을 돌아봐도 참 좋을 것 같은 훌륭한 산이다.
남도에도 어느새 가로수는 마지막 잎새 몇 장만 달고 바람의 희롱에 온몸으로 부대끼고 있었고 천황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막바지 단풍이 아직도 가을을 잡고 있어서 너무 고운데 떨어져 누운 잎들은 붉은 선혈이 낭자한 듯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순환의 섭리를 보면서 순환할 수 없는 낡은 몸으로 산의 심장부로 들어가는데 입동을 지난 날씨는 제법 겨울다워 싸늘했지만 여전히 몸에는 철이른 옷을 입어서인지 땀이 흘러내린다. 산기슭에는 위를 봐도 단풍이고 아래로도 단풍인 길을 오르다 보면 밟기가 아까울 정도의 단풍길이다.. 구름다리를 우회해서 오르는데 전날 비가 와서 바람폭포의 약한 줄기가 바람에 날리면서 월출산의 첫인상을 눈을 씻고 보라는 듯한데 폭포를 올라서니 과연 그 풍경을 어디에다 비유를 해야 할지 갑자기 머릿속에 숱한 영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설악산, 금강산, 작게는 운악산 등 그러나 어느 것에도 비교를 허락지 않는다는 듯 월출산만의 비경으로 우뚝한 것 같았다. 요즘은 해가 짧아서 긴 도갑사 코스를 피해서 비교적 짧은 천황사 쪽으로 가는데 처음으로 찾은 내겐 그 외 또 어떤 산경이 있는지는 모른 채 내 앞에 보이는 그 비경만으로도 너무 황홀 지경이었다.
정확히 봉우리 이름도 모르고 보는 것에 온 마음을 빼앗기면서 카메라 셔터를 닫을 수 없는 채로 한참을 오르면 통천문이 나오고 하늘문으로 들어가면 천황봉에 오른다. 천황이면 하늘의 황제인데 바로 옥황상제다. 그에 비하면 한낱 미물 같은 인간인 내가 볼 수 있는 비경은 눈앞에 보이는 것뿐이지만 시시때때로, 사시사철 그곳에서 모였다가 흩어져가는 비경의 파노라마는 아마 옥황상제만이 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흐려서 그 비경의 일부라도 맑게 보여달라고 부탁하면서 잠시 천황봉에 서 있어도 잠깐도 구름을 걷어주시지 않고 다만 조금 밝게 해 줄 뿐이었다. 언제나 명산에서 경험하는 일이지만 한 번에 다 만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또 찾게 되고 언제나 그립게 만드는 것 같다.
푸른 산은 늙지 않고 다만 변신을 할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세월인데 산은 그 세월조차 넘어서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너무도 작은 나는 무위자연의 위력 앞에 찾아갈 때마다 조금씩 마사토처럼 부서져간다.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월출산,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수려한 산세에 경외심으로 가득한 채 이제는 가을을 보내고 설산을 그리면서 하산을 하고 이제는 그 기다림으로 엄습해오는 혹한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또 하나의 꿈을 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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