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설악산 봉정암 만추 속으로

반야화 2015. 10. 24. 12:44

가을은 참 섬세하다.

성장기를 멈춘 산천초목은 아주 작은 풀포기도 가을의 손끝에서 다 물들어간다. 세상이란 큰 화폭에다가 오곡백과는 영글어서 보석같이 빛나게 하고 산천이며 들판이며 내 집 앞 작은 화초 이파리까지 화폭에 빈틈없이 꽉 들어차게 구성을 해놓았다. 이렇게 좋은 날, 이 그림 저 그림 속으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려는 철부지 마음이 하는 짓을 몸도 투정 부리지 않고 다 받아주고 있다. 그 마음이 느닷없이 봉정암에 가고 싶다고 보채니 몸은 또 그리로 데려다주고 참 고맙기도 하다.

 

참으로 느닷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전 날에 산행 단체에서 설악산 오색에서 봉정암 거쳐 백담사로 내려온 느 산행이 있는 날이어서 일단 신청은 했다가 취소하고 혼자서 그 반대 코스를 가기로 하루 전에 결정하고 떠났으니, 먼 여정이지만 마음이 이미 떠났는데 몸이 따르지 않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산행을 하다 보면 유명한 사찰을 많이 가긴 하는데 말 뿐이지 한 번도 들어가 살피지 않고 스쳐 지나버린다. 난 그게 늘 아쉬움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은 불안도 하지만 17.9킬로를 혼자서 가기로 했다. 불자라면 꼭 가봐야 한다는 5대 적멸보궁을 또 스쳐지날 수 없어 백담사와 봉정암을 간다. 그런데 너무 긴 여정이어서 하루에 다 하기는 무리여서 봉정암에서 일박을 하고 대청봉에 올랐다가 오색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봉정암은 적멸보궁인데 그 뜻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다섯 군데 적멸보궁이 있다.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영월),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에 있다. 이중에 세 곳을 다녀왔는데 두 곳을 언젠가는 또 혼자서 꼭 가봐야겠다. 둘이라면 더 좋지만 여건이 안 될 때는 혼자 가면 좋은 점도 분명 있다.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원하는 걸 놓치지 않고 다 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좁은 길을 왕래하는 버스가 아찔하게 비켜가는데 그 양 옆으로 계곡의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리 정서적으로 무딘 사람도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우선 백담사에 들려서 경내를 둘러보고 곧장 봉정암을 향해간다. 계곡은 쭈욱 이어졌는데 구분선도 없이 백담계곡, 수렴동 계곡, 구곡담 계곡 이렇게 세 개의 계곡을 지난다. 이곳은 명승 99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멋진 계곡을 보기 위해선 여름에 가야 한다. 그러나 구곡담 계곡의 담에는 옥수가 가득해 뼈골이 다 드러난 계곡이지만 이곳이 구곡담이라는 명목을 상징하고 있었다.

 

1박을 한다고 생각하니 느긋하게 명승 계곡을 오른다. 두 뼘도 안 되는 발로 긴 골짜기 18킬로의 선을 긋는 일이고 그 선은 잠시 휘어졌다가 뻗어 내렸다가 구곡 담을 굽이치고 대청봉으로 휘어졌다가 오색으로 5킬로를 내리 꽂힐 것이다. 짐은 어느 때보다 무거워 몸이 휘청일 때도 있지만 혼자만의 길은 여기가 어디쯤인지, 얼마나 왔는지, 얼마를 더 가야 하는지 알 필요조차 없이 차도 마시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온갖 멋을 다 부리면서 설악의 멋진 화폭 속으로 무심히 들어가는 그 자유로움이 너무 좋다. 이번 여정에는 기도라는 주제가 있는 길이다. 기도라고 하면 뭔가를 기원한다는 선입감이 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아니다. 뒤돌아 보면 짧은 삶의 여정이 아니었지만 그 긴 길에는 가장 먼저 이슬 맞으면서 거미줄 걷어가며 정화수 한 그릇 뜨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고 꽃길도 있었고 어둠의 터널도 있었고 머무르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 모든 인생행로의 여정이 꼭 등산하는 거와 같은 것이다. 산행을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르고 내리고 막히고 헤치고 그러다가 경치 좋은 곳에선 머무르고 싶었지. 그런 날들이 이제야 뒤돌아 보니 무사히 잘 지나온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해서 오늘은 아무런 기원도 없이 오직 감사기도만 드리련다. 이처럼 내 인생 소풍길을 원하는 데로 걷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나도 내 한계점에 다다르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라고 귀천을 노래해야겠다. 구차한 한평생을 살고도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시인 가슴은 세상을 다 품듯이 넉넉한 삶도 있었다는 걸 알기에.......

 

내 앞 뒤로 수많은 행렬이 지나고 있지만 나와는 다 상관이 없으니 내 눈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난 나 혼자 간다. 그런 내 앞에는 모두가 붉게 물들었는데 푸를 줄만 알았지 붉을 줄을 모르는 독야청청 노송이 이웃의 붉은 치마를 얻어 입었는지 그 굵은 몸매에 다홍색 치마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참 재미있기도 하고 붉은 융단에 노란빛을 띠는 생강나무는 지는 가운데 피어난듯한데 그 노란 잎이 바람에 날리니 노란 나비처럼 이쁘게 살며시 구곡담 말간 옥수에 내려앉아 면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3시 반쯤에 깔딱 고개를 넘어 봉정암 바로 밑에 이르러 뒤 돌아보니 지나온 길은 산 그림자 내려앉아 안갯속에 보이는 먼산의 실루엣이 장엄하고 암자 뒤 꼭대기는 빛을 받아 한층 돋보인다. 잠시 쉬어가는 자리에 다람쥐는 월동준비에 바쁘다. 볼보다 더 큰 알밤을 까먹는다고 옆에 사람이 있어도 아랑곳없이 그 이쁜 모습을 가까이서 보여주니 너무 이쁘다.

 

깔딱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큰 사자바위인데 암자를 수호하듯 떡 버티고 오가는 사람을 다 살피는 듯하다. 4시 정도에 봉정암 경내에 들어섰는데 이 높은 자리에 어쩌면 이렇게 아늑하고 밝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 자장율사가 받은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자리 같았다. 암자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에는 부처님의 12제자가 다 있는 것 같은 바위들이 늘어서 있고 법당 뒤 가장 우뚝한 곳에는 부처의 형상이 뚜렷하게 있는 그 모양새를 보면 설악산이 연화대같이 암자를 받쳐주고 봉정암은 연꽃 속에 내려앉은 부처의 모습으로 극락정토같이 보였다. 이토록 신령스러운 곳에서 철야기도를 하는데 밤새도록 비가 온다. 기도 중에도 언뜻 스치는 생각은 내일 아침이면 며칠 동안 전국을 뒤덮었던 미세먼지의 때가 다 씻겨지고 해맑은 아침이 열릴 것 같은 생각에 열심히 정진하고 그 맑은 광명의 아침을 맞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철야기도가 끝나고 뻣뻣한 다리를 겨우 세우고 법당 밖을 나오니 비는 그쳤지만 밑에서부터 한없이 구름이 위로 밀려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구름이 다 걷힐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짐을 챙겨 대청봉 쪽으로 올라갔다.

 

아침 먹고 7시에 출발해서 천천히 걸어서 9시에 대청봉에 도착했는데 역시 그 좋은 풍경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이번 산행은 봉정암이 목표였기 때문에 대청봉의 자존심으론 언제나 주인공이고 싶은지 덤으로는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해서 그냥 내려가라는 뜻으로 알고 처음으로 줄 서지 않고 인증사진을 찍고 오색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보는 대청봉의 운무를 볼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인데 아쉬웠다. 그런데 봉정암에서 대청봉 오르는 길에는 철쭉이 봉긋한 겨울눈에 보석 같은 이슬을 반짝이고 있는 군락을 보면서 내년 6월에 꼭 이 길을 다시 오르리라 맘먹고 오늘은 봉정암을 본 것으로 만족하고 천천히 내려가는데 시간이 이러서인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혼자서 한참을 내려가니 위쪽에는 말랐던 단풍이 계곡에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색리의 지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5킬로나 되는 길을 오늘은 완전 내 것 같다. 시간은 넉넉하고 길은 아름답고 오가는 사람조차 아직 없으니 그 여유로움이 얼마나 좋은지, 길도 촉촉하고 공기는 신선하고 유유자적한 발걸음이 설악의 비경을 다 삼켜버린 운무였지만 운무의 배경 속에 단풍이 얼마나 고운지를 즐기면서 길목에 펼쳐진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내 안에 넣으면서 걷는 길에서 오늘 하루 너무 행복한 기억으로 남긴다.

 

 

 

계곡의 돌탑이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다.

 

 

 

 

 

 

 

 

 

 

 

 

하심 하라는 뜻 같다.

 

 

 

 

부처상 아래도 바위들이 나한상같이 늘어서 있다.

부처의 좌상

사리탑

암자 위에 앉아 있는 부처의 좌상이 신비감마저 준다.

 

 

 

겨우살이

 

 

 

 

 

 

 

 

 

 

 

 

'등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안 구봉산  (0) 2015.12.02
영암 월출산  (0) 2015.11.11
설악산 흘림골의 단풍  (0) 2015.10.14
간월산과 신불산(영남알프스 구간)  (0) 2015.10.04
가야산 국립공원의 남산 제 1봉(천불산)  (0) 201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