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지속되는 거라면 난 그것을 찾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눈이란 거, 생애 처음으로 눈을 알았을 때나, 첫눈의 환상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엔 주름도 생기지 않는다. 볼 때마다 하얀 미소의 파문이 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바탕이 원래는 순백의 결정체 같기 때문이 아닐까. 흑백으로 양분되는 겨울의 느낌에서 까맣다고 생각하면 몹시 가난해질 수도 있는 마음에 하얗게 눈 속에 묻혀보면 금방 수북이 쌓여가는 넉넉하고 부유해지는 마음이 된다. 채색되지 않은 두 마음이 들쑥날쑥하던 겨울도 입춘이 지나고 나면 힘을 잃는다.
연 사나흘씩이나 눈이 내려서 깊은 눈길을 걸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투사처럼 나섰는데 그 다져진 눈길이 하루빛살이 뭐라고 다 녹아내린단 말이냐, 허망했다. 차도 아닌 차도로 겨우 비집고 들어갔는데 규봉암 찾아드는 길 초입에서부터 습기 먹은 눈을 밟으니 솔잎, 갈잎이 눈과 범벅이 되어 아이젠 침 속으로 뭉쳐져서 떨어지지도 않고 눈사람처럼 뭉쳐진다. 뽀드득뽀드득 효과음까지 내며 걷던 즐거운 눈길이 이제는 그만 끝인가 싶어 질퍽이는 눈 물이 아쉬운 눈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눈 물이 생명을 길러 올리는 마중물이 된다고 생각하니 금방 새싹이 보인다.
지루한 눈 물 젖은 길 끝에 그래도 뭔가가 있어 등급을 매길 수 없을만큼 비할 데 없다는 이름, 무등산의 진가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걸었다.
잠시 후 역시 있었다.규봉 앞에서 그 진가를 확연히 깨달았다. 마치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쑥 뽑아 옮긴 듯한 두 개의 석주가 있고 위쪽 끝에는 둘이 곧 하나라는 의미의 연결석까지 얹어놓았다. 그 거석 앞에서 작아진 마음을 놀라움으로 채운 채 규봉을 지나 높은 돌담 안으로 들어가면 규봉에 주불 자리를 내어준 듯한 작은 암자가 있고 암자 뒤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입석들이 암자를 따뜻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거대하고 잘 생긴 바위라면 그냥 돌이 아닐 것이다. 분명 규봉은 때를 기다리는 미륵불이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경외감까지 드는 무등산의 걸작이 틀림없었다.
규봉암을 지나 장불재로 가는 길은 너덜지대를 지나고 너덜지대에 눈이 쌓인 모습은 마침 우리나라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는 모굴스키의 경기장처럼 올록볼록하게 이쁘다. 그리고 길은 편안한 산책길 같은데 나뭇가지에 녹다만 눈꽃이 올망졸망 달려있는 목화밭 같았다. 전체가 하얀 설산도 좋았지만 송이송이 솜 송이 같은 나뭇가지도 무척 운치 있었다. 이쁜 눈길을 한참 걷었더니 장불재 쉼터가 나오고 다행히 식탁까지 있어서 편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점심자리에서 멀리 입석대가 보이고 정수리에는 제법 하얀 눈꽃도 있어 보여서 마음이 급하다. 날은 따르고 눈은 녹아지고 언제 저기까지 가나 싶어 혼자 내달랐다. 그런데 입석대로 바로 오르는 지름길이 아닌 긴 임도로 돌아갔다. 마음은 급한데 얼마나 멀던지 헐떡이며 찾아든 서석대 가는 길엔 온통 하얀 눈꽃이 그대로 있어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남보다 먼저 올라 여유롭게 아름다운 서석대에 독락을 하렸더니 질러오는 사람들과 서석대에서 마주치고 나의 독락의 여유는 누리지 못하고 말았지만 서석대 앞에서 바라보는 멋진 풍경을 잠시 혼자 보고 오롯이 즐기는 짧은 시간은 서석대 사이사이에 하얗게 피어 있는 눈꽃만큼이나 내 마음도 꽃이 피었다. 눈꽃과 조화를 이룬 웅장한 서석대, 너무 아름다웠다. 내가 그리던 완전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기대치에 돌덩이 하나 내리니 충분히 기대를 채워줄 만큼 아름다웠다.
무등산은 참 순한 산이다. 구릉지에서 아무나 맛볼 수 없는 수박을 길러내는 어머니 성품 같은 산이어서 완만하고 모나지 않아서 익숙한 마실길 같은 편안한 산이어서 좋다. 푸르고 꽃까지 피어나는 무등산을 상상하며 원점으로 하산하는데 그 길도 너무 편안했다. 세 번째 눈 산행이다. 설경도 이제 끝이겠다. 눈이야 오겠지만 내가 만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있어도 없는 것이다.
규봉
입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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