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덕유산 설경

반야화 2018. 2. 7. 13:09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 내가 보고 있는 내 마음을 그린다.

천상병 시인의 "아름다운 세상 소풍...."그 소풍 안에도 내가 보고 있는 저 아름다운 장면이 있었을까, 아마 그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똑같은 장면을 목격했다면 귀천은 아름다움에 대한 수식어가 더 그려졌을 것이다. 그분의 구차한 인생을 아름다웠노라고 귀결 지울 때의 아름다움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었는지가 새삼 알아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덕유산은 설경의 성지다.밤새 무주구천동을 흐르던 물들이 살금살금 올라와 온 산천에 꽃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 고결한 순수를 즐기는 것이 나의 연중행사가 된 것은 어떤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림을 덕유산은 해내기 때문이다. 강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물감으로 오직 한 색상만으로 섬세한 붓터치를 바늘 같은 낱낱의 솔잎까지 한 잎도 빠뜨리지 않고 하얗게 그려낼 수 있는 자연의 귀재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기다림인지........

 

매표소에는 계속 멘트가 나온다."산 위 기온이 영하 40도입니다.그래도 가십니까?" 포기할 거였으면 나서지도 않았겠지요. 속으로 생각하면서 대답 없이 표를 사고 삐걱거리는 곤돌라를 타고 20여분 올라가는 동안 창은 하얗게 얼어서 밖을 조망할 수조차 없었다. 기계도 얼려버릴 맹추위에 삐걱이는 소리가 두렵기도 했지만 기어이 우리들을 산 정상에 올려놓는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겁주는 멘트만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준비를 재정비하고 모두가 얼굴을 싸 동였으니 일행을 찾을 수도 없어 함께 간 동생들과 먼저 하얀 바탕색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간다.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에서부터 키 작은 관목들이 입은 상고대는 평소에 모습을 담아내는 수식어를 다 잊어버린 듯 와,하고 소리 민 지르게 만든다. 장 자크 루소가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욕구는 첫 몸짓을 유발했고 정념은 첫 목소리를 토해냈다.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육체적 욕구가 아니라 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 같은 정신적 욕구에서 온다"라고 했듯이 그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육체적 욕구는 말없이도 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말없이도 물을 마시면 되니까. 그러나 정신적인 것은 말을 하지 않으면 행동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목소리를 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속으로만 구겨 넣을 수 없는 감정들, 주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고 마구 터져 나오는 소리를 질러 낸 것들이 아름답다, 멋지다, 황홀하다. 등의 언어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 그 소리들을 우리는 오늘 다 토해냈다.

 

향적봉을 지나 주목들이 몸을 마치 바람풍선의 춤사위 같은 모양으로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 같은 곳에서도 사진을 찍고 주목과 더 잘 어울리기 위해 한 발 함부로 딛는 순간 깊은 눈 수렁으로 빠져서 도움 없이는 몸을 빼낼 수 없었는데 그러한 눈 장난을 하는 동안에도 얼핏 '러브스토리에 snow frolic의 한 장면이 떠올라서 마음껏 웃고 즐기는 놀이가 너무 행복했다. 나잇값을 안 해도 되는 허락받은 곳으로 생각되는 눈밭은 겨울이 제공하는 선물처럼 생활의 침전물을 다 쏟아내는 정신 정화의 결과물을 만들어주니 얼마나 좋은지

 

중봉에 올라서니 멀리 지리산 천황봉까지 보인다. 하얀 바탕색을 딛고 파아란 하늘을 이고 섰는 내 주위는 모두가 그림이다. 왼쪽에는 겹쳐진 산봉우리의 곡선과 흘러내린 산자락의 눈이 만들어낸 하얀 이랑들의 멋스럽고, 오른쪽엔 전체적인 은막의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내려서야 하는 백암봉 가는 하얀 계단과 말목으로 만들어진 긴 길이 너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그런데 중봉을 내려가는 능선에 칼바람이 얼마나 혹독한지 볼을 떼린다기 보다는 칼날에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 그 바람 맛을 보지 않으면 어떻게 겨울을 안다고 할 것인가, 힘들지만 그것도 재미에 포함시켜 백암봉을 지나 동엽령으로 간다.

 

동엽령 가는 길은 넓게 다져진 길이 아니고 곤돌라로 왕복하지 않는 산꾼들만 지나는 길이어서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욱 따라가는 길인데 눈이 키만큼 쌓인 곳도 있고 골짜기 바람이 얼마나 거세었으면 그 길 따라 자란 나무들은 곧게 자라고 싶어도 바람이 그냥 두지 않고 마구 휘저어 흔들어서 나무마다 멋진 작품 같은 곡선을 만들었다. 바람은 신이다. 신은 보이지 않아도 대단한 위력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람도 신처럼 그 위력을 메게를 통한 결과를 나무에다 걸어 놓았다. 그렇게 전시물 같은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걷다 보니 이제는 하산길이다. 신나게 온 산을 때 묻히듯 함부로 놀았더니 하산길에서 피로감을 살짝 느끼면서 미끄럼 타듯 내려왔다.

 

혼자였다면 좋은 걸 봐도 속으로 감정을 넣기만 했을텐데 셋이서 함께 하니 넣어 둘 감정은 하나도 없고 온 산천에 다 뿌려놓고 왔다. 그래서 좋은 건 함께 보는 사람이 있어야 배가 된다. 언니처럼 따라주는 그녀들이 있어 너무 즐겁고 만끽했던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 이 또한 미래에 꺼내어 만져보고 시간을 되돌리는 나의 정신적 양식이다.

 

 

 

 

 

 

 

 

 

 

 

 

 

 

 

 

 

 

 

 

 

 

 

 

 

 

 

 

 

 

 

 

 

 

큐피트의 화살까지 꽂아놓은 하트 모양의 신비

쌓인 눈의 높이

 

 

 

 

바람의 작품

 

 

인체의 상고대

 

연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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