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9일의 치악산, 산행거리 13.1킬로, 비로봉 높이 1228미터, 산행시간:약 7시간,기온:영하 13도풍속,초당 15미터
이 악조건 속에서 기대에 대한 보상과 수고에 대한 보상을 그 이상으로 받으면서 내가 그리던 추상화 속으로 들어가 물아일체가 되어본 날이다. 꽃 진 자리, 일진 자리, 단풍 진 자리, 숫한 색상들을 입고 그들의 일생이 지고 난 자리를 하얗게 덮어버린 산천의 단조로움이 최상의 화려함이란 걸 보여주는 치악산 설경 속에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끊어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였을까, 일 년이란 날들이 만들어낸 오탁악세의 흔적조차 하얗게 지워버려야 모든 걸 시작한다는 듯이 일시적은 어떤 중지처럼 산천은 모든 생명을 끌어안고 동면에 들어가고 생명들은 하얀 눈 속에서 봄을 위한 꿈을 꾸고 있는 중이다.
처음으로 간 치악산인데 하필이면 눈 덮인 산경을 보고와서 그 산세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어디쯤에 어떤 것이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모든 게 눈 속에 묻혀서 길이 좋은지, 계단이 있는지 바위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순한 산은 아닐 것 같은데 오르내리는 경사도만 느꼈을 뿐이다. 그런 하얀 세상 속을 걸으면서 나의 연상작용은 끝없이 일어나고 그 작용은 꽃도 피고 관목과 교목의 짙은 녹음도 만들어내고 단풍 들게 하면서 분주한 상상을 하면서 걷는 재미가 너무 좋았다.
부곡탐방지원센터로 들어가는데 찬 바람이 너무 심해서 처음부터 시린 얼굴을 감싸고 가는데 바닥에만 눈이 있을 뿐 기대하던 눈꽃은 없어 보였다. 아무리 흔들리면서 피는 게 꽃이라지만 화무십일홍도 못 되는 눈꽃이 바람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무심히 눈길을 한참 오르니 쭉쭉 뻗은 낙엽송 군락이 멋스럽지만 늘씬한 몸매에 푸르름이 지고 나니 꼿꼿한 성품만 남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얀 바탕색에 곧게 무리 지어 있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는데 곧은재에 올라서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곧은 성품만 있을 줄 알았던 낙엽송들은 하얗게 분 바르고 사치도 부릴 줄 알고 삐쭉삐쭉 키워온 쓸데없는 화라지 송침도 왠지 나무의 장식같이 이쁘게 보였다. 그리고 비로봉을 향해 올라가는 능선은 눈벽을 만들어서 스틱을 넣어보니 50센티는 쌓였고 더러는 1미터가 되는 곳도 있었다. 그것이 다 적설량은 아니지만 바람의 언덕을 밟고 가야 하는 길에는 앞서간 사람의 깊은 발자국 구덩이에 뒤따른 사람이 다시 발을 넣고 빼야 한다. 새롭게 발자국을 만들어보고 싶은 장난기를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내 몸은 그 깊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어쩌다 같은 발자국에 발을 넣지 못하는 순간에는 여지없이 넘어지는데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비틀거리는 자유로움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눈 쌓인 길엔 쉴 자리조차 없어서 점심도 서서 간편식으로 때운다.겨우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올라가는데 스피치를 착용하지 않아서 신발 속으로 들어간 눈에 양말까지 젖어서 걱정이 되어 혼자 체열을 만들려고 속도를 내서 오르다 보니 전망대가 나오고 아무도 없는 하얀 눈 속에 혼자가 되어서 눈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를 느끼며 그 순수함에 젖어 있는 순간이 고요한 행복감이었다. 수고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아름다운 보상이다. 그 행복감을 안고 비로봉을 찾아 가는데 세찬 바람은 볼을 떼리고 손발도 시리고 속도는 나지 않고 가도 가도 비로봉은 멀기만 하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걸었는지 시리던 발에도 온기가 돌아오고 손도 녹으니 그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잠시 먼 곳을 응시하는데 하얀 나뭇가지 사이로 뭉게구름이 참 이쁘구나 생각했는데 그것이 구름이 아니라 눈 덮인 비로봉이었다. 우뚝한 1228미터의 비로봉이 마치 구름처럼 하얗게 보였다. 멀리서 보면 도깨비 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던 것이 비로봉에 올라서 보니까 촘촘하게 짜인 큰 돌탑이 두 개 쌓여 있었다.
비로봉에서 조망되는 사방의 설경이 검은색이라곤 없었는데 그 멋진 설경 속에 오래 머물 수가 없을 정도로 바람이 맵고 손발이 시려워서 아름다운 설경을 내 눈 속에도 다 넣지 못하고 하산길로 들어섰다. 비로봉을 다 내려선 하산길은 미끄럼틀 같아서 재미있게 미끄러지면서 어느 때 보다도 빨리 내려간 것 같다. 푹푹 빠지는 눈 길 속에서 발을 건져 올리는 걸음이 느려져서 예상시간보다 늦었지만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눈 맛이었다. 봄에도 치악산이 그렇게 멋질는지 그 봄이 기다려진다.
곧은재 아래 낙엽송군락을 올라가는 경사도의 사진
멀리서 본 구름 같은 비로봉
비로봉
하산해서 뒤돌아본 비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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