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등산복 깊숙이 간수해두고 자연도 나도 봄옷으로 갈아입고 나서는 봄나들이다, 봄 한 철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매화마을에 난 처음으로 가는 길이어서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상상 속의 그 꽃밭에서 나비처럼 놀리라 생각하면서 간다. 그리고 봄볕에 반짝일 섬진강과 다도해 풍경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내 맘에 꽉 들어차는 남쪽나라다. 그런데 한 두어 시간쯤 달렸을 때 내 공상에 금 가는 소리가 난다. 오수휴게소 전 터널에서 일제히 차들이 줄지어 멈춰 서더니 잠시 있으니 119 엔브런스, 경찰차 레커차들이 줄줄이 터널 쪽으로 들어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아마도 사고가 크게 난 것 같았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리면서 코스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정해진 코스로 가기로 했지만 난 내심 그냥 꽃밭에서 놀다가 섬진강도 거닐고 소설 토지의 현장이나 봤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나 혼자 B코스로 가서 꽃인 듯 눈인듯할 매화밭에서 충분한 시간을 즐기면서 잘 놀고 싶었으니 다수의 의견에 따라 백운산으로 갔다.
남의 일은 태산이 무너져도 나에겐 별일 아닌 것이 세상이치인가? 앞에서는 생사의 기로도 모르는데 잠시의 정차를 못 견뎌하고 일정의 차질에만 신경 쓰는 것이 역지사지로 생각하니 금방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약 한 시간 정도 지체된 후 산행이 시작되는데 오늘은 해 질 녘이 되어야 꽃을 볼 수 있겠구나, 그렇게 되면 꽃 사진 찍기가 다 틀렸구나 싶었다.
등산이 시작되는 곳에는 화사한 남쪽이 아니었고 백운산 가는 길은 큼지막한 돌들을 징검다리 건너듯이 올라가야 했다.바람이 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였고 정상까지 가는 길이 계속 가파르게 치닿기만 한다. 그렇게 정상 밑 팔부능선 정도에는 주류를 이루는 나무들만이 빽빽한데 그들은 다른 수종은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텃세를 부리는 것 같았다. 인간 세나 자연 세나 비주류의 설움은 같은가 보다. 그리고 그 군락의 나무 아래는 작년에 꽃 피우고 말라죽은 산죽들이 게으른 농부의 병든 벼이삭들의 잔해처럼 베어 지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서있다. 다른 식물들은 꽃이 절정이고 그 절정의 순간이 끝나면 결실이 있는데 산죽은 절정이 곧 죽음이라는 게 슬픈 일이다.
정상 아래서 점심을 먹고 쉴틈도 없이 가는데 오를 때와는 달리 능선길이 부드러워서 힘들었던 발바닥의 충격을 다 흡수해 주어서 휴식같이 걸었다.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살펴볼 것도 없이 가는데 내려갈수록 진달래가 붉게 피어 의정표도 없는 헤매는 길에 위로가 되어주었다. 옆으로는 선진강이 나뭇가지 틈으로 백 사정처럼 보였지만 가려지지 않는 곳에서 멋지게 볼렸더니 가도 가도 그런 곳은 없고 길을 잘 못 들어 무척 힘들게 하산하는데 해는 얼마 남지 않았고 걱정이 되었지만 "문 밖은 길로 통하고 길은 어디로든 다 통한다"는 그것 하나 믿고 밑으로 밑으로만 가는데 강 쪽으로 가야 된다는 의견과 마을 쪽으로 가야 된다는 의견이 나누어졌지만 다행히 마을로 접어들어 길을 찾았다.
마을에 내려서니 내가 상상했던 꽃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 지지 않고 나를 기다려 준 꽃이 고마워서 옅은 빛을 겨우 살려 이쁜 매화를 담을 수 있었다.그러나 길 잃은 나그네에게 바람결이 실어다 주는 매향은 너무 향기로웠다. 아! 오늘은 다 볼 줄 알았던 섬진강도, 다도해도 장대한 지리산의 원경도 다 날아가고 지친 몸과 발가락에 상처만 남았다. 다음 또 다음에는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산행이 될 것을 빌어봐야겠다.
산죽의 최후
백운산 정상
산 위의 매화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