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가을의 여운

반야화 2020. 11. 18. 11:55

올여름엔 유례없는 비를 한꺼번에 쏟아내더니 가을 들어서는 비를 내리지 않아 먼지만 날려서 한동안 뒷산에도 가지 않다가 오랜만에 단비를 만나 여름 내 걷던 길로 들어섰다. 바짝 마른바람 타고 흩날리던 가랑잎들이 비에 젖어 차분해진 산길에는 연초 찌는 향기가 물씬 풍겼다. 아직도 잊히지 않은 연초 향기는 내 어린 시절의 진한 고향 향기로 남아 있다. 온 동네가 담배농사로 일 년의 시작과 끝이 되는 연중행사였다. 마지막 과정이 초록색 담뱃잎을 엮어서 높게 지은 토굴에다 층층이 걸어 말리는 건데 잘 마른 것은 잎 전체가 노랗게 익어야 되는데 거기엔 얼룩 한 점도 없어야 일등품이 되고 일등품이 나오면 그해 농사는 성공적이다. 그렇지 못한 것은 이등품으로 팔려 나간다. 연초를 찌는 날은 동네의 큰 행사였고 토굴을 갖지 못한 집에서는 남의 토굴에서 쪄야 한다. 담배를 엮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막걸리 파전이 새참으로 나오는 그날은 모두가 노랗게 익어 나오는 연초만을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며칠간 불을 지피고 지켜보는 것이 마치 도자기를 구워내는 일과 흡사했다.

그 많던 담배농사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어떻게 다 조달하고 있는 걸까. 그 시절 온통 담배밭이었던 곳엔 사과농장으로 바뀌어서 상전벽해가 되었고 담배 찌는 풍경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지나고 나니 그 시절이 아련한 추억이 되는 장면이다. 그 추억을 되살려 주는 것이 늦가을 비 온 후 산길에서 낙엽 밭을 밟을 때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젖은 낙엽에서 고향 냄새가 묻어 나오는 것이 난 너무 좋다. 녹차향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진한 맛이 온몸으로 베어진다.

꽃도 입도 다 여의고 나신으로 푸르름과 이별을 하는 나무는 아름답던 자기 모습을 훌훌 벗어던지는데 나에게는 그 이별 장면이 한없이 공허로 다가온다. 비록 아무것도 달지 않고 엄습해 오는 혹한과 맛 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모든 걸 다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현상은 다 떨쳐내고 성품만 안으로 품는다. 그 성품에는 꽃도 잎도 다 들어 있어서 강한 모성으로 지켜내다가 봄이 오면 이쁜 새끼들을 다 드러내는 천국의 향연을 펼쳐내는데 한 계절을 풍미할 일대 장관까지 안으로 품고 있는 자연은 위대하다. 그래서 자연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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