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성삼재-노고단-피아골 삼거리-임걸령-노루목-삼도봉-하개재-토끼봉-명선봉-연하천 산장-벽소령-덕평봉(선비샘)-칠 선 봉-영신봉-세석평전-촛대봉-연하봉-장터목-제석봉-통천문-천왕봉-개선문-로터리대피소-망바위-칼바위-중산리로 하산
내가 몇 년째 지리산종주를 하는 이유: 체력변화의 테스트, 아직도 건재한다는 자부심, 할 수 있다는 과시 등, 결과는 변함없음과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었다는 것. 지리산처럼 큰 산은 일기예보를 믿으면 안 된다. 늘 변수가 따른다는 걸 알아야 되는데 비 예보가 1~4 밀리미터, 그리고 이튿날 오후 맑음이다. 비가 온다고 받아놓은 날의 약속을 깬다는 건 용기 있는 자만 할 수 있다. 지리산 종주라는 긴 여정 중에 비는 소나기 같았고 바람은 초속 20미터, 준 태풍급.
6월 5일 밤 11시 16분, 수원역에서 여수 엑스포행 무궁화호를 타고 전남 구례역에 새벽 3시 15분에 기차에서 내리니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더니 문이 열리자 까만 칸칸에서 메뚜기떼처럼 뛰어내리는 인파들에 놀랐다. 일시에 쏟아진 사람들은 역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구례 버스터미널로 십 분간 이동, 20분간 정차했다가 3시 40분에 성삼재로 출발해서 성삼재에 4시 15분경에 도착했다. 저마다 달무리 같은 불을 켜고 까만 밤길을 또각또각 걸으면서 차가운 새벽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 어떤 의식을 치르기 위한 경건함마저 들게 하는 걸음걸이다.
기차에서 거의 잠을 못 잤지만 지리산의 알싸한 새벽 공기는 신체의 모든 기관들을 일시에 깨워버리고 한 번도 누구의 폐포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처녀 공기를 마음껏 불어넣어 준다. 가뿐한 몸으로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니 5시 5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 아침을 먹고 지난번에 느꼈던 풍경을 연상하면서 노고단 아래까지 갔다. 그런데 섬진강에서 피어오르던 운해가 산 위에 넘실거리는 구름바다가 되고 사람은 하얀 운해 아래 심해 속의 작은 동물 같았던 그런 풍경은 없었고 대신 운해가 일던 그 자리에 첫새벽의 푸른 원경의 곡선 위로 붉으레 구름이 물들고 노고단 능선 뒤로 멀리에 보이는 천왕봉 위로 하루의 문이 열리는 장관을 본다. 어쩌면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비장한 밤길을 걸었던 의식 인지도 모른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노고단 오르는 길은 10시가 되어야 개방한다.
노고단 아래서 바라보는 풍경,검은 밤이 밀려나고 새벽이 열리는 기도의 시간과도 같은 경건함으로 바라본다.
1500미터가 넘는 노고단이 나즉히 보인다.
덜꿩나무 꽃이 한창이다. 꽃술이 꽃잎보다 더 길게 나와서
꽃술이 돋보이는데 가막살나무꽃과 흡사해서 착각하지만 이것은 꽃이 좀 더 크고 더 이쁘다.
알고 보면 잎도 다르다.
앵초꽃도 제철을 만나고
가뭄이 심하다는 걸 보여주는 길은 먼지가 심해서 길가에 풀들은 인간이 일으킨 하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새벽이슬에 세수도 못하게 선잠을 깨워서 미안하다.
땅에는 먼지가 많은데 산천초목은 너무도 싱싱하고 푸르다.
오늘은 구름이 있어도 시야는 아주 맑아서 자연의 색들이 원래의 모습은
언제나 이렇다고 자랑한다. 마치 내 싸구려 카메라가 갑자기 화소가 높아지는
이변을 일으킨 것 같다.
임걸령
노루목에서 보는 풍경
삼도봉에서 보는 풍경
노고단 능선 뒤로 높게 보이는 곳이 천황봉이란다.
우리는 저기까지 가야 한다. 눈으로는 깜박할 사이의 거리지만 20시간을 걸어야 도달한다.
천왕봉에서 보면 아름다운 둔부처럼 보이던 반야봉이
삼도봉에서 가까이 보이는 모습은 보통의 산봉우리 같다.
사슴들의 숨바꼭질
긴 뿔은 감추지 못하고 나에게 들켰어.
화개재의 넓은 공터인데 옛날에 이곳에도 장이 열렸다고 한다.
토기봉에 좁다란 토끼길이 무척 이쁘다.
길섶에는 지고 없는 철쭉들의 잎이 무척 정갈하다.
병꽃의 계절.
함박꽃(산목련)
조릿대의 꽃
꽃이라면 어떤 기대의 결실 같은 것인데 그래서 화려하고 이쁘고 누구나 갇고 싶은 것인데
대나무 꽃은 슬픈 꽃이어서 보는 마음이 아프다. 어떤 기대의 절정이 아닌 바로 죽음의 꽃이기 때문이다.
20년을 살아야 겨우 피는 꽃인데, 꽃이 피고 나면 죽는다고 하니 대나무는 꽃 피는 것이 가장 두려울지도 모른다.
길가에 대꽃이 가득 피어 있다.
이것은 마치 까치집 같지만 구상나무의 자연스러운
얽힘이다. 스스로 까치의 집이 되어주려고 몸 보시를 한 것 같다.
둥굴레 꽃도 제철이다.
작년에 온 산이 하얗던 돌배꽃이 거의 다 지고 연하천 대피소의
맑은 물이 꽃을 지켜주었는지 이곳에만 아직 남아 있다.
누룽지를 끊여 먹고 출발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갈길이 먼데 걱정이다.
동의나물 꽃
벽소령에서 자고 6일, 이튿날 아침 6시경에 세석으로 가는 길을 나선다.
첫날 벽소령대피소에 들어오니까 빗줄기는 소나기로 변하고 밑에서 바람이 태풍같이 불어 오른다.
다행히 우리는 벽소령대피소까지 왔지만 세석까지 가야 하는 사람들은 길을 나서기가 무서울 것 같다.
문도 여닫을 수가 없고 세면장, 화장실도 나갈 수가 없다. 너무 심란하다. 낮시간대에 일찍 도착했는데 다행히 이런 날은 숙소 문을 일찍 열어준다고 해서 우리는 방으로 올라가 한참을 쉬어도 비는 더 심하고 할 수 없이 비옷을 입고 다시 취사장으로 가서 어설픈 저녁을 먹었다. 씻지도 못하고 누웠는데 내일까지 비바람이 이 정도면 천황봉까지 갈 수 있을지 무척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새벽쯤에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비가 올지라도 바람만 심하지 않으면 종주를 위해선 꼭 천황봉까지는 가야 한다. 어두워서 새벽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6시 아침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바람도 심하지만 어제 같지는 않아서 세석으로 올라가는 길을 나섰다.
벽소령을 지나 선비샘에서 다시 물병을 채우고 간다.
거센 비바람 맞으며 세석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다.
형제봉, 형제 사이에 살고 있던 소나무가 죽었다.
둘 사이에 어떤 다툼이 있었을까? 형제봉이 너무 커서 한 걸음 물러날 곳이 없으니
카메라 속으로 다 들어오지를 못한다.
세석 늪지에 살고 있는 외 갓냉이 꽃과 동의나물 꽃
구상나무 새순이 꽃보다 이쁘다.
계절의 여왕이 벗어놓고 떠난
왕관, 아니 화관이 한 시절 풍미를 버릴 줄 아는지 헤로운 모습이다.
비구름이 몰려오고 약하게 비가 내리는데 가뭄이 심하다니
비 오는 것쯤은 선물로 생각하련다.
구름에 휩싸인 연화봉
연화봉을 넘어서니 거센 바람이 불고 풀도 누워버린다.
지나온 연화봉
높이 오를수록 아직도 남아 있는 철쭉이 있어 초록 속에서 더욱 빛나는 모습이다.
꽃 같은 자매의 미소
드디어 장터목이다.
연하봉에서 비도 거의 그쳐 가고 구름 속을 헤매던 시야에서 반가운 산천이 드러난다.
와, 하는 환호성이 터지고 참고 걸어온 보람이 있어서 우리에게 천황봉에 오르는 자격이 주어지나 보다.
비가 개이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니 온 세상이 말갛게 씻겨나간 초록색이 너무 좋다.
장터목에서 참고 참았던 따뜻한 커피를 연거푸 마셔도 속이 데워지지 않는다. 빵과 커피와 누룽지를 삶아서 아침을 먹었다.
여름에 비옷을 입는 건 헛 일이지만 안 입을 수도 없고, 겉은 비로 잦고 안은 땀으로 젖는다.
오랜만에 단비가 내려서 산천초목은 해갈이 좋아서 허리가 부러지도록 춤을 추고, 우리는 안팎이 젖어 저체온이 될 것 같은
무서움에 몸을 떤다.
장터목 아래 물굽이 같은 초록이 흘러간 계곡이 너무 아름답다.
제석봉에 이런 무늬가 있다는 건 혹시 제석천황님의 발자국이 아닐는지?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
드디어 천황봉에 오르다.
중산리로 하산하는 길도 온통 꽃과 잎이
어우러진 초록세상이 맑고 투명해서 비 온 뒤의 아름다운 지리산의 모습이다.
재미있는 개다래 잎과 아래에 꽃이 있다.
꽃은 자그맣게 잎 밑에 있어서 벌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는다. 그래서 잎이 나섰다.
잎은 꽃처럼 변신을 하고 벌을 유혹하기 위해서 하얗게 변하는데 멀리서 보면 사람도 속을 만큼
꽃같이 보인다.
개다래 꽃이 잎 밑에 아주 작게 피었다.
계곡까지 다 내려오면 칼바위가 있다.
비가 많이 왔는지 계곡의 물이 우렁차게 흐른다.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그러나 보고도 만지지 못하는 물이다. 물도 흘러가고 우리의 여정도 흘러서 끝이 났다.
우중 속에 힘든 산행이었지만 무사히 마치고 계곡 식당에서 꿀 같은 음식을 먹었다.
집에 와서 씻고 나니까 자정이 다 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갈지는 쉼표를 찍어두었으니 때가 되어봐야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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