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봄꽃들이 피어날 때는 마음도 꽃처럼 활짝 피다가 꽃들이 시들하면 마음까지 봄의 허기를 느끼는데 이때 활기를 되찾기 위해 꽃 보러 간다.
오월 중순, 나뭇잎들은 윤기가 흐르고 봄바람은 아카시아 향을 실어 나르니 세상은 온통 향기로운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낮은 곳은 잎으로 가득하고 높은 곳엔 아직도 꽃을 볼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오늘은 설악산으로 간다. 목적지는 귀때기청봉,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한계령에서 올라가는데 설악산 코스는 거의 비슷하지만 처음부터 높은 돌계단을 가파르게 치고 올라 이어지는 계단에서부터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하자 이미 힘이 반은 빠져버린다. 삼거리에서 서북능선으로 향해서 귀때기청에 오른다. 명품산에 이름도 하필이면 나쁜 짓이 연상되게 지었을까 싶었는데 그럴만했다. 대청 1708미터, 중청 1664미터, 소청 1550미터, 귀때기청은 1577미터다. 대청에서 바라볼 때는 귀때기청봉이 대청이나 비슷하게 높아 보인다. 그래서 귀때기청도 나처럼 착각을 했는지 지가 제일 높으다고 으스대다가 대청, 중청, 소청 삼 형제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소청보다는 약간 높지만 삼 형제한테 으스댈 수는 없었는데, 겨우 27미터를 더 높다고 자랑하다가 망신을 당한 꼴이다.
귀때기청봉을 가기 위해서는 길 없는 길을 가야 한다. 잔돌도 아니고 모난 바윗돌들이 제멋대로 박혀있고 날카로워서 아주 조심해야 되는 구간이고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큰 상처를 남기는 곳이어서 이 돌길을 갈 때는 백 년을 그리워하는 이가 있어도 잠시 접어두고 무심으로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용하게도 서로가 잘 맞물려있어 밟아도 움직이지 않고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칼날 같은 곳을 디뎌도 조심하면 안전하고 발 디딜 곳은 다 있었다. 이 험한 곳에도 풍상으로 깎이어 흙 한 줌이라도 있었는지 이 척박한 곳에서도 꽃이 피어나니, 아무리 큰 돌덩이도 작은 생명 하나한테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본다. 멀리서 보면 칼날캍이 보이는 그 봉우리에 진달래가 붉게 덮여 있어서 힘들게 올라온 피로감은 간 곳 없고 마음이 급해진다. 사월초부터 피어난 진달래가 등산을 하듯 느리게 느리게 드디어 설악산 정상에 도착해서 봄의 향연을 가장 높은 곳에서 막을 내리려나보다.
봄의 향연 피날레가 진행되는 가운데서 우리는 관객이 되어 만찬을 즐기듯이 점심을 먹고 일행 중 일부는 대승령을 넘어가고 일부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산에선 언제나 이 시를 생각한다. 올라갈 때는 발밑만 보는 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놓치는 풍경이 있지만 내려올 때 또 다른 풍경이 있고 마음도 여유롭기 때문에 친구와 나는 험한 돌밭 중에도 반듯한 반석이 있어 커피를 마시면서 사방을 조망하고 모처럼 먼지 없는 푸르른 산을 한껏 즐겨가며 하산했다.
요즘은 맑음과 흐림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것 같다. 해가 나면 맑음이고 구름이 끼면 흐림이라고 하던 가상 진리가 이제는 미세먼지가 없으면 맑음이고 있으면 흐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아주 맑은 날이어서 설악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어던 행복한 하루였다.
귀때기청봉 아래 돌밭
날카로워 보이는 귀 때 기청이다.
김삿갓의 뒷모습, 설악산에 반해서 망악석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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