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사계

ㅡ한라산 영실단풍

반야화 2014. 10. 19. 14:48

 
한라산의 가을색
맑고 투명한 하늘이 너무 좋다. 이런 날은 보람 있게 쓸 의무감까지 느껴지는 날이다. 연 3일째 선물 받은 느낌으로 좋은 날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날이다. 오늘 한라산의 단풍까지 봄으로써 사계절을 다 본 셈이다. 아직은 2프로 부족한 듯 하지만 영실을 오르는 오른편 풍경은 은은한 단풍색이 요란하지 않은 갈색톤이어서 더 고급스럽다. 변화무쌍한 한라산인데 오늘은 구름도, 바람도 없는 따뜻하고 잠잠한 더없이 오르기 좋은 날이다. 영실코스는 산 아래 다 달으면 첫인상부터 그다음을 설레는 마음으로 보고 싶어 지는 비경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무 준비 없이 온 관광객까지도 위 로위로 끌어올리는 마력이 있는 코스다.
 
산 전체가 단풍나무는 아니지만 멀리서 보면 잔가지의 관목들이 함께 어울려 물들어가는 것이 마치 제주의 감물을 닮은 것도 같다. 제주의 특산품인 옷감에 감물을 들이려면 얼마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하는지를 안다. 한 자락 물에 담그면 무명천에 감물 번져가듯 한라산 한 끝에서부터 서서히 가을이 번져간다. 한라산은 그 변덕스러운 날씨의 심슬까지 다 받아 지니며 저 산에 물을 들이는 것도 산신님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 노고에 아침햇살이 감싸 안으니 갈색톤에 드문드문 포인트를 살려내는 빨간빛이 섞여서 내장산의 요란한 붉음보다 난 더 좋다.
 
작은 카메라의 눈으로 아름다운 비경을 다 살려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느리게 오르다가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는 시간까지도 가을 풍경 한 자락을 만들어내는 듯하다. 다 살려내지 못하는 정취를 마음에다 그려 넣으니 안팎이 다 가을물에 젖는다. 오른쪽은 그토록 아름다운데 왼쪽은 눈길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오른쪽은 구상나무가 많은데 그중에 또 죽은 나무도 있어 감히 가을 풍경에 끼어들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는 듯 하지만 천생 천사의 주목처럼 구상나무 역시 정신은 죽어도 육체는 살아서 그 뼈대들이 또한 멋스럽게 전체적인 한라산의 특징을 살려내는 데는 한몫하고 있기 때문에 무시받을 이유는 없다, 좀 더 높이 오르면 싱싱한 푸른 생명력이 넘치는 구상나무는 단풍이 아무리 고와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듯 독야청청하다. "너희가 아무리 같이 물들자고 유혹해도 난 푸르리라"하는 것 같은 호령이 느껴지는 절개가 이채롭다.
 
단풍이 주인공일 때는 야생화가 드물다.아마도 꽃 피워봤자 주목받지 못한다는 걸 알아서 그럴 거야. 가을 한 철은 단풍도 꽃이니까 자리를 내어주는 배려심이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라산은 조릿대 군락도 빼놓을 수 없는 특색이다. 멀리서 보면 잔디밭 같아서 마구 뛰어놀고 싶어 진다. 겨울에도 푸른 융단 같은 대숲이 있어 황량하지 않고 파릇한 기운이 넘치는 곳이어서 어떤 계절에도 찾고 싶어 지는 곳이다. 영실 드넓은 평원에 올라서면 한눈에 보이는 넓은 품이 높이를 잊게 하고 눈 아래는 크고 작은 오름들이 그림같이 이쁘다. 그뿐 아니라 둥그런 수평선에 꽃구름이 떠 있고 그 구름이 있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이루어 내는 그 중심에 서 있는 내가 마치 수미산을 여행하는 착각이 들게 한다.
 
영실로 올라가서 어리목으로 하산하는 게 일반적이다. 휴일에는 영실코스 밑에는 주차가 불가능해서 어리목에 주차를 해두고 택시를 타고 영실로 가는 것이 편하다. 그래서 하산은 어리목으로 하는데 그쪽 교목들의 숲에는 아직 단풍이 좀 이르다. 열흘 뒤에는 아랫부분까지 물들어서 전체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하면 다시 보고 싶어 지는 욕심이 생기지만 참아야겠지. 한꺼번에 끝내면 다음은 없어, 그러니까 남겨두자.
 
좋은 날 받아 가을을 만끽하고 나서 오늘은 저녁까지 보양식인 전복 코스요리까지 대접 잘 받은 참으로 행복한 날로 기록해둔다.

 

 

 

 

 

 

 

 

 

 

 

 

 

 

 

 

 

남벽에서 백록담 가는 길이 있던 자리, 저 길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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