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각 지방으로 떠나는 명절 전에는 서울이 가장 한가하고 조용한 때다. 이럴 때 고궁 나들이는 잠시의 망중한을 즐기기에 딱 어울린다. 큰 딸하고 고궁 나들이는 몇 번째 함께하는 우리 집만의 다른 풍속 같은 것이다.
코스를 고종의 길을 걷고 창경궁 후원을 걸어보는 걸로 정하고 먼저 작은딸 회사 건너편에 있는 명동성당 아래층에서 세모녀가 점심을 먹고 두 모녀는 덕수궁까지 걸어갔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는데 태풍 링링이 지나갔지만 나뭇가지 하나 다친데 없어 보여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어느 때보다 한가로운 거리를 걸어 덕수궁 후문을 지나면 미 대사관 관저 담장과 구세군 중앙회관 사이에 작은 쪽문이 있다. 덕수궁 담장의 몇 배를 넘는 키를 자랑하며 일대를 굽어보는 궁궐 안의 역사적은 나무는 푸르른데 그 아래 작은 쪽문으로 황제가 궁녀로 여장을 하고 피신을 했다는 아관파천 길을 보면 눈물이 난다. 길이 120미터다. 통로의 길이가 더 길었다면 어쩌면 발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120미터의 끝에 있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무사히 피신을 하셨고 일 년 후 덕수궁으로 돌아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한다.
고종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정동공원이 있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중명전이 있다"몰랐다.역사를 잊고 살았다. 부끄러웠다." 존재조차 몰랐던 중명전, 을사늑약만 알았지 그 장소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 장소가 중명전이란 건 더더욱 몰랐다. 현재는 덕수궁에 속해 있는 전각이지만 덕수궁과 뚝 떨어져 있어서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정동극장 뒤편에 있다. 현재는 고종의 길로 연결이 되어 있고 이번에 볼 수 있어서 뭔가 특별한 발견을 한 것 같았다. 고종의 길은 원래는 왕들의 어진과 신주를 모시던 선원전 땅이었던 것이 미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아관파천 120주년을 맞아 120미터의 길을 찾아서 복원하게 되었고 그 길 끝에 나라를 빼앗기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가 덕수궁 전각이란 게 밑어지지 않을 정도로 홀로 뚝 떨어져 외롭게 서 있었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이루어졌던 곳이다.
중명전을 돌아나와서 택시를 타고 창덕궁 후원으로 가서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보고 나오니 마침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어서 이 역시 처음으로 봤다. 오후 한 나절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 조용히 모녀가 고궁산책을 한 것도 너무 좋았다.
고종의 길 출입구,아주 작은 쪽문이다. 비밀통로가 눈에 띄지 않아야겠지.
구세군 중앙회관과 미대사관저 사이로 길게 담장이 이어져 있다.
끝 지점의 출입구
덕수궁 중명전, 황제의 서제로 지어졌으나 덕수궁 화재 후 고종의 집무실이 되기도 하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대한제국 역사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후에는 외국인의 클럽으로도 사용되었고 1963년 영친왕이 잠시 소유했다가
민간인에게 매각되었는데 2005년 노무현 정권 정부에서 매입해서 덕수궁에 포함시켜 대한제국 황실 건물로서의 위상을 되찾았다.
을사오적, 중간 상석에 이토히로부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을사늑약 찬성파인 바깥쪽 첫 번째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일본인인 하야시 곤스케
오른쪽 바깥쪽부터 반대파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선생이 앉았다.
끝까지 조선을 지키려던 참정대신 한규설 선생을 중명전 마룻바닥에 가두었다고 한다.
1905년 11월 17일 오후 을사늑약이 강행된 덕수궁 앞과 회의장 안은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기병 800명, 포병 5,000명, 보병 2만 명이 서울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민영기·이하영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지만 11월 18일 새벽 1시쯤 이완용을 필두로 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이른바 을사오적은 매국노의 길을 걷게 되고 이 비운의 현장은1910년 8월 22일 일본의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강제병합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의 어새
1906년 6월 22일, 고종은 프랑스 대통령에게 올리는 친서를 썼는데
일제가 위협해 강제로 이뤄진 것이며, "나는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고
이는 국제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뜻을 밝힌 친서를
대한제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9개 나라(미국, 영궁,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에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를 특별위원으로 하여 친서를 전달토록 밀지를 내렸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이 이 같은 고종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독살을 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창덕궁 돈화문
인정전
조선시대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창덕궁,
어떤 전각이 어떻게 쓰였는지 보다는 난 우리나라 궁궐 건축물의 미적인 면을 보는 재미가 더 좋았다.
각 전각을 이어놓은 작은 쪽문으로는 궁녀들이 지나다녔을 것 같다.
오밀조밀하면서도 유려한 곡선이 아름다운 창덕궁의 건축물이 서양의 화려하고 거대한 궁들보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미있게 봤다.
보물 제1764호 낙선재, 이방 여사가 1966년부터 1989년까지 기거하던 곳.
궁궐 안에 사대부 주택 형식으로 지어서 단청을 하지 않은 곳.
낙선재 만월문
아래로는 창덕궁 후원
규장각과 연못
영화당, 영조의 친필인 황금으로 쓰인 편액이 남아 있다.
불로문인데 하나의 통돌로 만들어졌다니 석공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속을 저만큼 파내고 깎고 다듬고 불로문을 만들다가 불로가 아닌 석공의
늙음을 보는 것 같았다.
옥류천, 창경궁 후원 가장 높은 곳에서 발원하여 후원 내에 있는 연못에 물을 채우고
꽃을 피우고 다시 흘러 창경궁을 통과하고 청계천에 합류하는 물줄기다.
어느 강이 든 발원지를 보면 하나의 작은 샘물 같은데 흘러갈수록 넓어지고 길어지고 큰 강을 이루는 걸 보면
"一中一切多中一(일중 일체 다중을), 一即一切多卽一(일 즉일 체다 즉일)"이란 화엄경의 원리가 생각난다.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하나다.라고 하는 거지, 즉 작은 발원지가 큰 강 안에 있고 큰 강 안에는 작은 발원지가 들어있다는
삼라만상이 일체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일체다.라는 원리다.
새싹으로 태어나 600년을 늙고 나니
제 몸체보다 이물질이 더 많이 들어찬 한 시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나무를 보면 인간의 생명이 너무 짧다는 걸 느낀다.
750년 정도 된 향나무, 제례 때 이 향나무를 깎아서 썼다고 한다.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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