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인제천리길 함께 걷기(자작나무 숲길)

반야화 2019. 1. 23. 11:31

       너무 멋진 것을 본 다음 그곳에 다시 가기를 주저할 때가 있다.

다시 갔을 때 처음 본 아름다움의 환상이 깨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고이 간직해두고 언제나 자작나무, 하면 떠오르는 그 모습이길 바랐지만 이번에 무참히 깨어졌다.자작나무 숲에는 처음 같은 선경이 없었다. 나무는 변함없는데 지난겨울 마치 불청객의 방문으로 눈밭에 놀던 백학이 일시에 날아오르는 모습 같던 그런 풍경이 아니었다. 꾹 다물었던 입은 어떤 탄성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탁세와 동떨어진 순수의 흰 바탕은 간 곳 없이 원래의 바탕은 흙이었다는 걸 보여주며 "너는 환상을 본 거야"라고 바로 알려주는 듯했다.

 

자연에서 실망은 없는 법, 지난번에는 하얀 숲을 보고 갔던 길로 되돌아 나왔는데 이번에는 자작나무 숲을 넘어서 그 일대 임도를 따라 걷는길로 들어섰다. 처음 가는 길이어서 그 끝이 어디에 다다르는지도 모르고 마냥 걷는다. 금방 마을로 내려서는 것인가 싶었더니 걷는 걸 좋아하는 마니아들만 모여서 걷는데 그리 짧을 리가 있겠어, 속으로 생각하며 다 걷고 나서 물어보니 13킬로미터를 걸었다. 걸으면서 뒤돌아보고 조금 걷다가 다시 뒤돌아 보는 것은 앞만 보고 갈 때와 뒤돌아 볼 때의 어떤 다른 풍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초록이 무성할 때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열심히 이쁜 꽃길이라고 설명을 덧붙여도 보이는 건 무채색뿐이다. 봄이나 여름에 다시 걷는다면 또 처음 걷는 길처럼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될 테지, 겨울을 알아야 봄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무심한 산길에 어떤 꽃들이 살았고 어떤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동면에 들어 있는 숲길에 오직 자작나무만이 깨어서 하얗게 겨울을 지새우고 있다. 새봄의 화가는 이 황량한 길을 어떻게 채색하는지 봄의 섬세한 에술성이 무척 궁금한 채 연상작용을 일으키며 걷는다.

 

긴 산길을 꼬불꼬불 돌고 돌아가는데 한국에서 가장 넓은 군이 인제군이고 그중에 800미터를 넘는 고봉들이 1/5 이 인제에 있다 하니 고산준령을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함께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길 위에 내가 있다는 것도 참 멋진 일이다. 길을 걸으면서 뭔가 한 가지라도 더 살피고 더 느끼려고 애쓰면서 걷는데 자작나무의 테마 길답게 산길 구간구간마다 하얀 자작나무가 많고 그 옆에 볼품없이 검게 주눅 들었으나 곧은 성품으로 쭉쭉 뻗어 있는 낙엽송의 대조를 보는 것도 재미있는 길이다. 그리고 원경에는 나무들의 우듬지 촉수들만 가지런한 전체의 산경에는 나목들의 잎자리가 다 드러나서 겨울나무의 진면목을 보는 것 또한 아름다운 길이다.그리고 그늘진 곳곳에는 눈이 남아 있어서 그토록 뽀드득뽀드득 걷고 싶었던 눈길의 묘미를 느끼려고 일부러 소리를 만들면서 걷는 재미가 있어서 그나마 다른 곳에서 올겨울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눈길을 걸었다.

 

높은 산 깊은 골이 겹겹인데 그중에도 어쩌면 그리도 양지바른 터가 있는지 그런 터에는 여지없이 사람이 살고 있으니 아무리 깊어도 터를 내주고 길을 내어 주는 산의 품에서만 인간이 살아가나 보다. 그뿐인가, 골골 마다 물까지 흘려보내 주니 산과 물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람이 아무리 영악해도 너그러운 자연의 품에서는 그저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다. 임도의 반 이상은 이미 있었던 길 같은데 원대리로 이어지는 방향에는 산을 깨어 길을 낸 갓 태어난 신작로가 있었다. 산이 자신의 일부를 깨뜨려서 길을 내어준 감사한 선물 같은 길을 걷는데 아직 더 손봐야 할 곳이 많았다. 깨뜨린 자리에 폭우가 내려도 거뜬히 잘 견뎌주기를 기원했다. 긴 임도를 지루하지 않게 다 걷고 나서 원대리 2반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차를 타고 다시 남춘천역까지 데려다주어서 참 편하게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니 무척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인제 천리길에 새봄이 이쁘게 내려앉아 더 많은 사람들이 깃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친다. 2019.1.19일 반야화 씀

 

 

 

 

 

 

 

 

 

 

 

 

 

 

 

 

 

 

 

 

 

 

 

 

 

 

 

달리면서 찍은 차창밖 소양호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