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안 올 줄 알았다. 그 봄이 세상이 다 얼어붙었던 지난 겨울,이 동토에 어떻게 봄이 다시 올까 싶었는데 봄은 다시 오고, 봄은 모체가 되어 죽움같았던 수많은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키워내는 중이다. 언젠가는 나 또한 흙이 되거든 저 꽃자리 하나 빌려서 해마다 다시 오는 자연이고 싶다.
지금 내가 빛이 차단 된 방 한쪽에서 손가락을 놀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바깥에는 봄이, 꽃이, 잎이 찬란히 빛나고 있을 테지. 아침에 강아지와 꽃길을 산책하고 왔는데 아름다운 길의 풍경이 지워지지 않고 어제 다녀온 북한산의 푸르른 산천의 풍경도 지워지지 않아 다시 달려가고 싶은 시간이다. 잠시도 잠잠할 수 없는 마음이 어디론가 마구 끄달리고 아무것도 안 해도 괜히 바빠지는 마음이 된다. 그것이 봄인가 보다. 멀리 가지 못 할 때는 창 넘어라도 보자. 창문 넘어도 온 갖가지 꽃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냥 있느냐.
어제도 북한산으로 갔다.오랫만에 원효봉으로 갔는데 성 안에는 꽃 같은, 꽃이 된 사람들이 놀고 있고 성 밖에는 삼각산의 장엄한 봉우리들이 꽃을 거느리고 " 좋지? 잘 놀아라"하고 보듬어주는 것 같다. 원효봉에서 보는 백운대와 노적봉, 만경대는 인수봉을 감추고도 삼각산으로 보인다. 인수봉을 빼고 노적봉을 넣어도 훌륭한 삼각산이 되는 부족함이 없는 위치가 원효봉이다. 그 외에도 의상능선이 멋지게 펼쳐져 있는 곳에서 우리도 풍경이 되어 보고 잠시 갈림길까지 내려와서 다시 백운대 가는 길로 올라갔다.
며칠 전에 비가 와서 계곡을 채워두었고 사람의 접근을 막아놓은 계곡물은 면경처럼 맑은 옥수가 가락을 지으며 흘러내리는 산길을 오르면 발걸음에도 장단이 붙는다.백운대 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게 올라야 하고 팔 부 정도 올라가면 깔딱 고개도 넘어야 하는데 힘들기도 하고 많이 올랐던 곳이어서 우리는 오르지 않고 백운동 암문을 넘어 우이동으로 내려갔다. 전 주에도 같은 길을 갔는데 한 주만에 산은 더욱 푸르다. 우이동으로 갈 때는 늘 도선사 길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주에 봐 두었던 사잇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꽃 속에 우뚝 솟은 인수봉의 실루엣을 뒤돌아 보면서 내려가는 길에 진달래가 한창이다.꽃길을 내려가는데 몇십 년째 북한산에서 산장에 짐을 져 나르는 지게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뒤에 따라오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부른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저렇게 큰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져 뻗뻗하게 굳어 있고 얼굴은 검게 타고 몸에는 오래된 지게가 한 몸처럼 붙어 다녀 겉보기엔 마치 걸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눈은 빛이 났고 그의 마음은 너무 즐거워 보였다. 그야말로 산꾼이며 평생을 그렇게 산사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난 그를 처음 보았다. 함께 길을 가는데 우리에겐 눈에 띄지도 않는 아주 작은 이끼 꽃까지 그에게는 친한 친구였고 산에 사는 모든 것이 그분의 친구 같아 보였다. 어쩌면 그분이 가장 많은 걸 가진 부자가 이날까 생각되기도 했다. 그가 가진 것은 아무도 뺏을 수도 훔칠 수도 없는 자연을 다 가진 부자였다.
산길을 다 꿰고 있는 그분에게 물어서 우리는 하루재를 한참 지나서 새로운 길로 가고 싶었던 사잇길로 접어들었다.북한산을 수없이 다녔는데 처음으로 가는 길이 아직 있었다. 하루재 밑에서 제2 백운대 탐방지원센터까지 가는 산길이다. 도선사행 아스팔트 길을 피할 수 있어서 좋은 줄만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길이었다. 하얀 마사토 길이 소금을 밟는 듯했고 좁다랗고 숲이 우거진 길가에는 온통 산벚꽃이 피어서 내가 좋아하는 봄 풍경이 거기 있었다. 난 산벚꽃을 무척 좋아한다. 산벚꽃은 송이가 작아서 멀리서 보면 팝콘나무 같기도 하고 불그레한 잎이 함께 피어서 더 이쁘기도 하지만 색상도 아주 희거나 핑크빛이 많다.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옆으로 뻗어가지 못하고 키만 키운 꽃이 봄에는 푸르름 속에서 드러내는 하얀색은 산천의 주인공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을 기대하지 않은 날에 보게 되어서 더없이 만족한 산행이었다.
원효봉 치마바위의 빗물자욱이 잘라진 나무의 한 단면같이 이쁘다.
염처봉, 운대, 만경봉, 노적봉
두 마리의 까마귀 같은 남자
노랑제비꽃
현호색
인수봉과 진달래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애썼다. 봉우리는 높고 진달래는 낮게 피었고....
새로운 길
아기별 꽃 같은 산벚꽃
하산길에 본 인수봉의 실루엣
멀리 도봉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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