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초가을의 색채를 깔아놓았을 것 같은 그 푸근하던 억새의 평원으로 간다.
부산에서 아침 아홉 시 12분이 된 시계를 보고 출발했는데 약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밀양 천황산이 제철을 맞아 등산객이 많이 모였을 줄 알았고 케이블카를 타기 위한 줄을 서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평일이어서인지 줄은 서지 않았고 십 분 만에 천황산에 도착했다. 평지보다는 바람이 조금 쌀쌀했지만 걷다 보니 금방 몸이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천 미터가 넘는 산 정상을 향해가는 발걸음이 즐거웠던 건, 옆에 산을 좋아하는 딸 부부를 동행하고 가면서 많은 걸 함께 얘기하고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마음이 너무 좋아서다.
기억은 변함이 없는데 현상은 늘 변하는 거구나. 표충사를 보고 사자평까지 올랐던 너무 오래된 기억 속의 사자평은 높은 산 드넓은 평원에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넓게 억새를 소복이 담고 있는 약간 오목한 쟁반처럼 보이는 평원이었다. 거기서 느꼈던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이 얼마나 좋았는지 다시 가야지라고 했던 세월이 수십 년 지났다. 그런데 산을 팔부능선까지 오르다 보니 사자평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도저히 내 기억 속의 드넓은 평원의 억새가 아니었다. 아니라고, 다른 곳에 내 기억을 채워줄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올라갔다.
살다 보니 생각의 기준도 변하고, 그 크기도 변하고, 기억은 소실되어가는가 싶은 산길이어서 내 인생의 가을스케치 같아 약간은 쓸쓸한 마음이었다. 나의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집 같은 것을 버려야 되는데 그것과 싸우다가 지게 되면 더욱 초라해지게 된다. 변화를 인정하자,라고 생각하고 천황제까지 갔더니 내 기억 속의 희미한 평원이 아닌 새롭고 그보다 더 좋은 억새평원이 있었다. 사자평 위로는 가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었던 걸 생각하면 예전에 오르지 못했던 정상이 너무 오르고 싶었고 궁금했다. 이번에 정상에 올라보니 천황산은 높으면서 어쩌면 그렇게 순하고 편안한 능선과 들판 같은 억새평원을 가지고 있는지 가을맞이로 너무 멋진 산이다.
마음 같아선 영남알프스의 아홉 봉우리를 완등하고 싶으나 이제까지 띄엄띄엄 올라본 봉우리는 이번에 오른 천황산, 재약산, 가야산, 신불산, 간월산까지 다섯 곳을 올랐다. 언젠가는 나머지 봉우리를 다 올라서 단번에 하는 건 아니지만 영남알프스의 아홉 봉우리를 다 올라볼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하는 것으로 천황산과 재약산 두 곳을 등산하고 하산했다. 하루에 두 개의 산을 오를 수 있는 것은 케이블카를 탔기 때문이다. 천황산에 올랐다가 정상에서 한참 내려서면 재약산으로 연결된다. 재약산은 정상을 찾아가는 길 안내도 잘 안되어 있고 길이 조금 험한 편이다. 그래서 올 겨울 12월부터인가, 완등 아홉 봉우리에서 제외한다고 쓰여 있었다.
재약산에서 원점회귀하려면 다시 천황산으로 오를 수도 있고 우회할 수 도 있는데 쳐다보니 다시 오르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우리는 샘물상회라고 표시된 임도로 걸어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했다.
케이블카를 타서 시간단축이 되었지만 산 두 개의 정상을 오르고 보니 왕복으로 약 네 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한참 동안 이렇게 좁다란 길을 따라간다.
키를 넘는 억새길이 참 좋다. 가을 속으로 쑥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억새 군락지에 섞여 있는 철쭉이 많다.
가을이다, 단풍이 물들었다. 첫 단풍을 여기서 본다.
밋밋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정상 아래 있는 천황재다. 넓은 데크 마루가 깔려 있어 점심도 먹고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천황산 정상에서 보이는 표충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 곳이다.
천황산 아래 있는 쉼터에서 내려다보니 저기가 사자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넓은 평원이 있다. 그러나 억새는 담겨 있지 않고 잡풀이 무성하지만 너무 좋아 보인다.
물매화, 높은 산 습한 기슭에만 있다는 물매화를 처음 봤는데 꽃도 이쁘지만 꽃 진 자리도 참 이쁘네.
하산해서도 시간여유가 있어서 조금 위쪽 계곡으로 올라가니 시례 호박소라는 곳이 나온다. 밀양팔경에 속하는 이곳은 해발 885미터 백운산 자락 계곡에 있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화강암으로 된 큰 그릇처럼 보인다. 한여름에 저 물그릇이 다 채워지면 폭포는 짧아지고 물은 깊어질 텐데 그 모습이 궁금해졌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도 지내는 곳이어서 기우소라고도 한다. 그리고 백운산은 천황산에 내려서서 보이는데 마치 백호가 포효하며 뛰어가는 모습의 하얀 바위돌이 있는 산이다.
계곡에 맑고 깨끗한 옥수가 흐르고 있어서 여름에 참 놀기 좋은 곳으로 보인다. 계곡을 내려와서도 날이 밝아 영남루로 간다.
밀양 영남루,
영남루는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누각으로 구 객사의 부속건물이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에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진주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히는 곳이라니, 3대 누각은 다 강을 앞세우고 있는데 이곳 역시 남천강이 흐르는 곳이다 야경이 아름다운 밀양의 명소라고 하며, 영남루는 보물 147호였다가 현재는 국보로 승격 재지정되었다고 한다.
밀양에서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서 밀양팔경 중에 제1경인 영남루도 보고 저녁도 먹고 하다 보니 유난히 큰 보름달이 보여서 다른 때보다 크다고 생각했더니 알고 보니 슈퍼문이라니 가장 멋진 곳에서 슈퍼문까지 보고 하루를 마감한 행복한 여행이었다.
영남루의 누각은 장소도 멋지고 건축도 특별하다.
누각이 양식이 참 아름답다.
영남루 앞에 흐르는 남천강, 밀양사람들이 부르는 밀양아리랑
에 나오는 강인데 집에 오는 차 안에서도 자꾸만 가사가 맴돌았다.
슈퍼문인줄도 모르고 밀양의 보름달은 크기도 하네,라고 하면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