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어.
유례없는 더위를 오래 겪으면서 가을이 아예 없어진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오래 기다렸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역시 가을은 푸른 창공 저 넘어 이디엔가 침묵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가봐. 봄은 땅에서 솟아나고 가을은 하늘에서 내린다고 생각되는 건 하늘이 먼저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더 높아 보이고 더 푸르고 금빛이 쏟아지면 가을이 오는 징조가 된다. 봄은 언 땅이 녹으면서 생명이 솟구치고 나무들은 눈 녹은 땅에서 습기를 힘차게 길어 올리며 눈을 뜨고 좀 더 상쾌한 봄기운을 느끼게 된다.
늦게 온 가을은 분명 짧아질텐데 벌써부터 마음이 바쁘고 달력에는 동그라미가 늘어선다. 머무는 시간보다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을을 쫓아다녀야지 다짐하며 높은 성벽을 따라 길을 가는데 하늘이 너무 푸르고 맑다. 높고 푸른 하늘이 마치 푸른 캔버스 같은데 아직 구름 한 점을 그려 넣지 않고 바탕색만 진하게 색칠해 놓았다.
남한산성의 기록은 많이 해두었다. 화려한 가을색도 있고 하얀 용마루 같은 여장의 옥개석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멋진 겨울그림도 있다. 오늘은 성밖에서 걷다 보니 사람이 없고 호젓한 성곽 아래 가을풀꽃이 정겨운 길을 친구들과 재미있게 걷는 걸음이 행복하다. 둘레길 전체를 혼자 걸으면 4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친구들과 즐겁게 걸으면서 좋은 곳에 쉬어가는 날은 하루해가 저물 수도 있는 긴 길이다. 오늘은 서문 쪽은 가지 않고 북문에서 하산했지만 4시간 넘게 걸린 것 같다. 짧은 가을이 매일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날씨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트레킹마니아들이다. 더 좋은 가을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안고 돌아왔다.
지하문에서 출발해서 벌봉까지.....
벌봉(봉암)
오른쪽부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인수봉까지 보이는 가시거리 좋은 날.
동문
전승문(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