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덤으로 얻은 산행 같다. 예정에도 없던 일정을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 영실 갈까" 하는 이 한마디에 우리는 산으로 갔다.
2014년 10월 중순에 찾았던 영실풍경이 스치면서 갑자기 변경한 일정이 자칫 놓칠 뻔했던 한라산 영실코스를 가게 되어서 너무 잘 한 선택이었다. 적기보다 약 열흘정도 늦었지만 아직 산 아래는 단풍이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높고 낮음이 가을을 맞는 시기가 다르다.
가을은 시간을 먹는 괴물인가, 하루에 며칠을 먹어치우는 것 같다. 가을인가 싶으면 바로 겨울이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바쁜지 따라가기가 힘겨울 정도다. 제주에는 갈 곳이 너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제쳐놓고 제주를 논하지 않는다. 어느 카페가 뷰가 좋은지, 어느 식당이 맛이 좋은지는 관심이 없다. 다만 한라산의 사계와 수많은 제주의 숲이 좋아서 제주로 간다.
단풍철을 맞은 한라산은 복잡했다. 매표소 앞에서 등산로까지 걸어서 가면 약 40분이 걸린다. 그렇다고 승용차가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다. 위쪽 주차장에서 차 한 대가 나오면 아래서 한 대가 올라갈 수 있다. 아침 열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누가 차를 빼고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그 시간에 하산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냥 그 빈칸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앞자리에 줄 서 있는 어느 여성분한테 부탁해서 차를 타고 오르긴 했지만 주차장이 비지 않아서 중간에 걸어서 갔지만 몇 분이라도 단축한 시간이 감사했다.
한라산 단풍은 화려하지 않음이 육지와 다르다. 워낙 바람이 많은 산이어서 수종에 따라 금방 잎이 저버리기도 하고 높은 곳은 단풍이 져도 산 아래는 단풍이 물들지도 않는다. 기암 쪽에는 갈색보다도 옅은 은색풍의 나무 우듬지가 서리꽃이 핀 것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그 사이사이에 예쁜 색의 단풍이 수를 놓은 것처럼 피어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톤이 은은해서 그건 그것대로 또 다른 가을색이어서 참 좋다.
영실에서는 단풍을 보면서 오르고, 어리목으로 하산할 때는 단풍 속으로 들어갔다. 산행시간은 충분히 즐기면서 했는데 약 다섯 시간 반 정도가 걸린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날씨가 씻은 듯이 맑다. 마치 선물처럼 기쁜 날씨다. 모든 것이 말갛게 보이고 남벽을 향해 오르는 내내 멀리 오름들도 너무 선명해서 마음속까지 투명해진다. 남벽에도 구름이 걸쳐지지 않아 온전하게 잘 보이고 윗세오름에서 바라보는 바다에는 벽 같은 구름층이 멋지게 펼쳐져 있다.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모호한데 산과 바다와 하늘의 선이 층을 이루는 것도 너무 멋진 풍경이다.
2014년 10월 19일에 영실에 갔을 때는 산을 오르기 전에 먼저 이런( 십 년 전 사진) 풍경에 압도된 채로 오른다. 올해는 조금 늦었더니 이 정도의 단풍은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을색이다. 은은하게 주름진 치맛자락 한 폭 같다.
비폭포
멀리 보이는 오름풍경
하산할 때는 억새도 많아서 가을의 색채를 다 볼 수 있다. 어리목으로 하산.
전에는 본 적이 없는 특별하고 이쁜 열매인 참빗살나무 열매가 분홍색과 붉은색이 있었는데 열매를 따 먹는 작은 동박새도 있다. 산을 한층 더 멋지게 꾸며둔 열매들이 참 많았다.
열매가 벌어지면 작은 꽃처럼 보인다.
사람과 친화력이 생긴 까마귀가 폼을 잡아준다.
색이 연분홍이어서 진달래 같은데 온전히 한 그루가 꽃을 활짝 피웠다.
산 위에서 보면 닿을 수 없는 하늘이 바다로 내려와 수평선과 선으로 경계를 지으며 맞닿아 있다.
이건 길에 깔아 둔 데크에 박힌 나사못인데 나무가 얼마나 오랫동안 닳았는지 못대가리가 이렇게 돌출되어 있다. 시간을 보여주는 한 껏.
하산이 끝난 곳에 있는 계곡도 볼만하다.
어리목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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