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푸른 녹음이 산천을 뒤덮은 초여름,
지난겨울의 설경에 매료되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산을 오른다. 그때 지루하게 내려왔던 코스를 이번에는 올라가는 산행이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산은 곧 훌륭한 시인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려도 될 만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말하는 시인이다. 시인이란, 가슴 깊은 곳에 고통을 감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비명이나 신음 대신 아름다운 음률로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산천 역시 그러하다. 모진 비바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는 언제 그러한 고통이 있었냐는 듯 봄에는 꽃피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신록으로 세상에 다 펼쳐놓은 풍경을 찾는 이는 그 음률을 읊조리러 시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유월은 일 년 중 가장 푸르른 시기다. 숲 속으로 들어가니 잎은 벌레 구멍 하나 없이 반질거리며 윤기가 나고 간밤에 비가 다녀가셨는지 땅은 촉촉하고 향기는 가득한데 초입에서 난데없는 야생화 같기도 하고 병아리 같기도 한 아기들이 소풍을 나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이쁜지 길 한복판에 피어 있는 금계국 같았다.
장마 전 뜨거운 햇빛은 지상의 습기를 다 증발해서 비를 모으기 때문에 초목이며 밭작물까지 다 갈증을 느끼는데 명산의 계곡은 유비무환의 대비가 있었는지 이 가뭄에도 묵은 잎 하나 떠돌지 않는 맑은 물이 콸콸 내려간다. 그 소리만으로도 목이 축여지는 것 같은 계곡길을 올라 바람이 넘나드는 동엽령에 올라서면 땀에 젖은 온몸을 에어샤워를 하게 된다. 동엽령에서 백암봉 가는 길은 이쁜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확 트인 넓은 길은 무심히 올라가지만 작은 오솔길은 길가에 스쳐지는 수풀들도 다 친구처럼 부대끼며 다정히 오르면서 세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걸게 된다. 원추리는 아직 꽃망울을 열지 못했고 감자꽃을 닮은 야생화가 무리 지어 덕유산 오솔길을 이쁘게 장식해준다. 그뿐 아니라 짙은 녹색잎에 숨은 함박꽃이 백옥 같은 흰색으로 탐스럽게 피어 있어 언듯 보면 마치 누가 티슈를 나뭇가지에 함부로 버린 것처럼 걸려 있는 듯이 보인다. 난 그런 함박꽃과 그 향이 너무 좋아 유월 산행의 묘미로 즐긴다.
두 달여만에 오르는 산길이 쉽지만은 않은데 촘촘히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도 느긋하게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걸어가는데 하늘도 파랗게 맑아지고 바람도 살랑 불어 기분 좋게 백암봉 능성길을 간다. 명산 속으로 들어가면 신선들만 마시는 공기를 조금 얻어마시는 듯 지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신선한 공기를 날 숨 한 번에 들 숨 두 번을 마시고 싶어 진다. 그러므로 산은 만병통치의 능력을 가진 신통의라고 믿어도 좋다.
그동안 많은 산행을 했지만 처음으로 보는 꽃이 있었다. 조릿대 꽃인데 대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도 몰랐다. 처음으로 본다는 건 무엇이든 반갑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대나무는 종류가 많아서 어떤 것은 백 년에 한 번 핀다고도 하고 보통 몇십 년 만에 꽃이 핀다니 분명 귀한 것은 맞다. 그런데 대꽃은 상서롭지 못하다는 뜻을 알고 나면 그리 반갑지도 않다. 왜냐하면 꽃이 피는 시기는 대나무가 그 명운을 다했기 때문이라니, 언뜻 생각하면 생명 있는 모든 것이 다 죽을 때는 추해지는데 마지막에 꽃을 피우고 생을 마감한다는 그 생애가 참 멋있고 아름다운 삶 같은데 또한 생애 마지막 꽃이 명운을 다한 상서롭지 못하다는 의미를 알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겨울에 이어 두 번째 가는 덕유산을 보면서 하얗게 뒤덮였던 눈 속에 이렇듯 많은 생명이 잠들어 있었구나 하는 생명의 어머니를 대하는 듯 위대하게 느껴져서 산에 사는 식구들, 꽃과 잎 새소리 바람소리까지 여름 한철을 멋지게 풍미할 때 나 또한 그 식구에 포함되고 싶어 푸르 름이 다할 때까지 찾아가리라 마음먹는다. 또다시 하얀 눈이 이 모두를 품어 안을 때까지.
오수지 골, 오수자 스님이 득도했다는 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