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전 소백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입춘은 땅 속에서 시작되듯이 비로봉 투명한 눈 길 밑으로 눈 녹은 물이 졸졸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입춘은 먼저 땅을 녹여서 생명이 깨어나게 한 다음에 따스한 기운은 산이 품고 있는 뭇 생명들을 언 땅을 쩍쩍 가르며 얼굴을 내밀게 하고 햇빛은 새 생명들을 알묘조장이라도 할 듯이 마구 끌어올릴 태세다. 봄은 이미 그렇게 서서히 입춘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버들강아지 눈뜨는 얼음장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가락을 짓고 소백산은 봄의 왈츠 서곡이 흐르는 듯했다.
소백산 옆구리 아슬아슬한 버스길을 무던히도 지났는데 정작 그 산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른 채 죽령을 넘나들었던 때가 있었다. 서울에 살면서 친정에 갈 때는 중앙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죽령휴게소에 쉬어 가는 재미가 있었지. 거기서 산세도 보고 인삼이랑 마를 넣어서 쥬스 한 잔 마시고 인삼을 한 보따리 사서 친정 가던 그 고갯길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고 편리함을 얻는 대신에 재미를 잃었다.
처음으로 소백산을 간다. 삼가탐방지원센터에서 달밭재까지는 시멘트 길로 오르다가 비로사 방향으로 들어가는 길은 왠 쪽으로 쭉쭉 뻗은 솔밭을 끼고 가는데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생성되는 시간이어서 그 향이 온몸에 스며들어 오르는 동안 피로를 몰아내도록 도와주는 것 같았다. 솔밭은 비로봉이 보일 때까지 이어졌고 길은 눈이 녹아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구간이었다. 요즘 날이 따뜻해서 소백산에도 땅에만 눈이 있는데 멀리서 보이는 비로봉 꼭대기에 눈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도착하기 전에 다 녹을 것 같아서 열심히 올라야겠다고 열을 올리다 보니 정면으로 비로봉을 보고 오르는가 싶으면 길은 옆으로 틀어져 있고 또 다가가면 아니고 팔부능선까지 왔겠지 싶으면 길은 계속 옆으로 비켜서서 비로봉을 잠깐씩 밖에 보이지 않아서 애가 탔다.
약 1킬로미터를 남겨둔 지점에서는 비로봉 꼭대기에 눈이 마치 교황님의(주케토)베레모같이 보였다. 이제 시장기도 몰려오고 속도를 내기엔 역부족인데 마침 일행들이 점심을 먹고 있어서 포기하고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차 한 잔 마시고 또다시 비로봉을 향해 열심히 오르는데 1킬로가 아닌 것 같았다.그래서 내 속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비로봉이여, 그대는 아시는가 내마음이 얼마나 바쁜지를, 그대를 만나기가 수렴청정 뒤의 임금님 보기보다 더 힘드나이다".
그렇게 힘들게 올랐더니 그 댓가를 치를만한 황홀 지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몇 개의 산 봉우리를 넘고서야 주봉을 만나는데 이 코스는 가장 먼저 만나는데가 주봉인 비로봉이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게 만났는지를 상상해 보시라. 비로봉에 섰을 때의 내 감흥은 이러했다. 이제까지 명산은 만날 때마다 "여기가 가장 좋구나"하던 그 기준이 경신되는 순간이라는 것, 소백산은 사실 태백산이나 함백산보다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덕유산이 가장 좋다고 했다가 이번엔 소백산이 더 좋다고 했으니 높고 깊기가 지부 해함이랄까 산에서 볼 수 있는 마을이 없었고 높이는 마치 하늘에 닿은 듯해서 구름같이 보였다. 희미한 원경이 구름인지 산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1400미터 정도가 양지바르오 보면 한라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비로봉에서 보이는 연화봉과 천문대 뒤로 보이는 산세가 그렇게 보였다.
비로봉에서 사방의 조망을 마치고 연화봉 쪽으로 가는데 바람 많기로 소문난 곳이 웬일인지 바람은 너무 조용했다. 그러나 그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눈 속에 누운 풀들의 자세가 바람의 세기를 말해주는 듯 다 골짝에서 비로봉을 향하고 누웠다. 그 높은 산 위에 넓은 평원이 있고 양 옆으로 확 틔어진 중심 능선길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하늘 산책을 하는 여유를 부렸다. 비로봉, 연화봉 그 어디에서 보나 너무 멋진 풍경, 겨울산의 매력에 푹 빠졌다. 눈이 있는 바닥과 눈이 없는 나뭇가지들의 경계가 마치 멋진 호피무늬 같기도 하고 사방으로 흘러내린 그 물결들이 백의민족인 우리 겨레의 옷감을 만산에 펼쳐놓은 듯한 깨끗함이 너무 좋았다.
연화봉에서 희방사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 미끄러워 밑으로 내려 꽂히는 것 같았지만 일행들이 다 무사히 하산해서 감사했다. 그 유명한 희방사도 보고 희방폭포도 보고 그동안 이정표만 보면서 지나던 죽령 위를 올랐다는 감회가 너무 진한 감동을 준 날이다. 희방사는 깊고 깊은 연화봉 아래서 기쁨의 전설을 안고 호랑이의 포효 같은 희방폭포를 거느린 채 조용히 소백산 자락에 터를 잡고 소백산의 미물까지도 상구보리 하화중생(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함)의 뜻을 구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