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설경을 본다는 건 잡다한 한 해 동안의 마음속을 마무리와 시작의 교차점에서 버리고 떠나기 같은 갈래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순수의 절대적 가치를 안겨준다.
덕유평전은 형체 없는 유령 같은 것들의 놀이터였다. 구름이 놀고, 바람이 놀고, 찬서리들이 놀다가 덕유산의 정령에 붙잡혀 깜짝 놀라 얼어붙어 정체성을 드러내고만 하얀 유령들의 주검 같은 세상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형체 있는 인간들은 그 하얀 밭에서 좁디좁은 신들의 발자국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비켜서지도 못하고 부딪치며 미소로 지나친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내리면 때 묻은 발을 들여놓기가 미안할 정도로 순백의 절정이 사뭇 치도록 아름다웠다. 단체로 내려섰지만 그곳에 발을 딛는 순간 뿔뿔이 흩어져 인솔자의 통제는 이미 힘을 잃고 저마다 사진 찍기에 바빠 엄청난 인파에 묻혀 일행을 다 놓치고 만다. 그러나 걷다 보면 다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한 곳으로 모여 돌아오게 된다.
설천봉에서 향적봉 가는 길은 좁고 사람이 너무 많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누군지 모를 까만 머리만 가득 차버리다. 그래서 마음을 접고 향적봉에 오르면 거기까지만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아 인증하려는 사람들이 떨면서 길게 줄을 서 있다. 이제 그런 건 다 놓아버렸다. 인증보다는 난 한눈에 보이는 눈밭이 좋고 빈 가지에 얼어 붙은 상고대와 하얗게 펼쳐져 있는 원경이 너무 좋다.
덕유산에 여러 번 가도 중봉에서 파란 하늘배경 아래 겹겹이 늘어서 있는 산들의 굴곡진 원근감의 명징한 풍경을 일망무제로 바라보며 한없이 빠져들던 기억은 단 한 번뿐이었다.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산이다.
설경이 가장 좋은 산은 단연 덕유산이다. 설악은 바람이 너무 드세니까 눈을 다 날려버리고 한라산은 백록담까지 가야만 상고대를 본다. 그런데 덕유산은 상고대가 얼어붙기에 딱 좋다. 바람이 많으면서 봉우리들이 뾰족하지 않고 완만해서 습기가 닿으면 날아가기 전에 빨리 붙잡아 둔다. 그래서 겨울 덕유산에서 설경을 보는데 실패가 없다. 눈꽃이 아닌 가느다랗고 키 작은 관목들이 마치 튀김옷을 입고 기름솥에 들어가기 직전의 쑥갓 모양이고 덩굴들은 무명실 실타래를 하얗게 풀어놓은 것 같이 보인다. 상상이 가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높은 봉우리들이 구름 속에 묻혀
내가 선 곳이 어디인 줄도 모른 채
지나가고 봉우리를 휘감은 구름들이
다 덕유의 바람에 붙잡혀 꽃을 피웠다. 하얀 꽃밭은 무수한 발자국이 지나도 때 묻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좋고 깊은 눈 속으로 풍덩 빠져봐도 좋은 자유로움이 너무 좋다.
한 해를 잘 살아내야 덕유산의 바람맛을 볼 수 있고 순백색 눈의 정령을 만날 수 있다. 내 몸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것도 누리지 못한다는 걸 안다.
중봉을 지나고 백암봉, 동엽령을 지나 안성탐방안내소로 하산하는데 산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지나온 길이 한바탕 꿈속을 헤매다 나온 것 같았다. 나뭇가지엔 바짝 마른 갈잎이 그대로 붙어 있고 바닥은 눈이 있지만 나무들은 빈가지만 곧추세우고 혹한에 맞서고 있는데 계곡엔 얼음짱 밑으로 졸졸 물소리가 재미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행복한 시간으로 2022년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상제루
향적봉휴게소
겨우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