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구례 둥주리봉,오산 사성암

반야화 2014. 3. 23. 10:29

봄이 왔다. 김용택 시인의 책 한 권을 보고 난 뒤부터 봄이 오면 섬진강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는데 그 봄도, 나도, 우린 약속을 지켰다. 자연만큼 정직한 게 없다. 봄이 언제 온다 하고 오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꽃이 언제 핀다 하고 피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닮아가는지 세월의 두께가 책장처럼 쌓여가면서 자연을 닮아, 나도 작정을 하고 나면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편이다.봄과 섬진강은 불가분의 관계처럼 이미 설정된 곳이다. 강변 따라 그만큼 긴 길에는 봄의 색으로 덧칠을 해놓는 거대한 화폭이 되지만 이번엔 좀 이른 시기에 그 장관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무를 보면 꽃은 연상작용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도 본다.

 

구례 동해마을에서 둥주리봉으로 오르는데 처음부터 가파른 난코스로 들어서면서 맑은 공기가 폐에 도달하기도 전에 바로 토해지는 길을 오르는데 길가에 야생 난초가 지천으로 자라고 더러는 꽃까지 피웠지만 인파에 밀려 향기까지는 맡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가파른 비탈길에 터를 잡은 난초는 꼿꼿한 기개의 군자다움이 없이 추레한 절름발이 양반처럼 고개를 숙이고 바로 서지 못하는 모습이 꽃이 없었다면 못 알아볼 뻔했다. 힘겹게 둥주리봉까지 오르고 나서는 오산까지 비교적 완만한 산의 등줄기를 걷는데 그 끝에는 어떤 비경이 있을지 그 기대감으로 한가로이 걷다 보니 진달래 붉은 입술이 봄맛을 보고 있다.처음으로 마주할 때가 가장 반갑고 이쁘다. 우리는 살면서 늘 처음과 마주한다.

 

내가 산악회를 좋아하는 것은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 처음의 맛을 주기 때문이다. 이만큼 살이도 처음은 늘 경험과 함께 하는 것 같다. 처음 보는 것, 처음 만나는 사람들, 처음 보는 것. 삶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을 후생의 경험으로 남길 때까지. 이런 사유를 하는 동안 어느새 오산에 이르고 보니 건너편으로 지리산의 봉우리들이 이번만큼은 지난 겨울의 눈 덮인 지리산 종주의 자취를 경험의 눈으로 본다.참 반가웠다. 오산은 높진 않지만 사방으로 신선의 경지로 보이는 절경들을 휘두르고 서 있다.그토록 그리던 구례의 들판과 시가지, 섬진강이  림처럼 보인다. 섬진강의 물비늘이 반짝이며 구례 들판을 감돌고 강물은 실핏줄처럼 구례 들판을 돌아 나오면서 뭇 생명들과 곡식들을 살찌우고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면서도 아무 일도 한 게 없다는 듯 무심한 심성으로 바다로 간다. 또 한쪽 지리산 깊은 골짜기 아래는 인자로운 해님이 따사로운 빛을 그 깊은 골짝까지 어루만지면서 작은 마을에 비춰들어 그들의 소박한 삶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사방을 조망하고 조금 내려오면 사성암이 마치 오산의 꽃송이처럼 절벽에 아스라이 피어 있다. 신선이 없으면 명산이 아니라는 말처럼 사성암의 신선이 되신 원효, 의상, 도선, 진각의 네 명승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구도처가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찾아드는 인파 문에 예전의 신령스러움이 깨진 것 같아서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늘의 산행을 마치고 문책마을로 내려오니 또 하나의 풍경인 매화가 오산 아래 겨울나무에 눈꽃같이 피어 있어 새봄의 절정이었다.아무런 수고로움 없이는 어떤 기쁨도 맛볼 수 없다. 장시간 힘겨운 수고로움 끝에 우리는 그 아름다운 댓가를 맛보는 것이다.

 

아침 출발이 늦어서 기대하던 산수유마을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오늘의 여정이 그거 한 가지 뺀다 해도 다 용서가 될 만큼 오산 풍경의 감흥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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